SamSuka
까만늑대
까만늑대

fanbox


던파 - 두 배틀 메이지

리메이. 예쁘게 빛나는 금발을 양갈래로 묶은 소녀의 이름이었다. 웨이브 진 머리칼처럼 앙증맞은 몸임에도 불구하고 몸매에 은근한 굴곡이 있었다. 검은 미니스커트와 허리에 걸쳐진 보석 장식이 찰랑거리며, 자신있게 걷는 그녀는 배틀 메이지로 제법 유명한 모험가다.

마치 군마와 같은 기세로 꺾는 그녀의 터프함이란! 게다가 주변을 읽어내는 관찰력이나 은근히 남을 신경써주는 배려심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자연스레 그녀를 동경하는 모험가가 하나둘 늘었고, 종국엔 제법 인기인으로 활약하게 됐다.

리메이 역시 이런 인기를 거부하지 않았다. 곁에 사람이 늘어난단 건 그만큼 영향력이 넓어진단 뜻이다. 그래서 사람 한 명 한 명을 소홀하게 대하지 않았고, 그녀의 곁의 사람은 점점 늘어났다. 종국엔 그 지방에 영향력있는 사람까지 초청할 정도가 되니, 리메이는 귀족의 예법까지 배워야되나 싶었다.

훙-

그런 리메이가 간만에 혼자가 됐다. 손엔 밋밋한 봉을 휘두르며, 악단 잃은 지휘관처럼 홀로 놀았다. 이렇게 혼자 있던 게 얼마만인가. 사람들이 귀찮은 건 아니었지만, 시달리다시피 남과 함께 했었으니 이런 시간도 제법 의미가 있었다.

리메이는 휘파람을 길게 뽑았다. 한밤 중, 이런 어둑한 거리에 자신만 있다고 생각하니 제법 해방감이 들었다. 그렇게 검은 롱부츠로 바닥을 밟던 중, 소란을 들었다. 그녀의 예민한 귀에 잡힌 건 여인의 뾰족한 목소리와 남성의 욕설이었다. 그냥 흘려들어도 무슨 위험이 있나 싶을 정도로, 그 음색은 긴박했다.

타박- 리메이는 곧장 소리의 진원지로 방향을 바꾸었다. 안그래도 어두운 길거리에서 더 짙은 어둠이 시작되는 골목길. 거기로 향하니 소리는 더욱 커져갔다. 몸싸움도 일어났는지 뭔가가 떨어지고 부딪치는 소리도 났다.

리메이는 여전히 여유롭게 걸었고, 소리의 시작점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곳엔 다섯 사람이 있었다. 그중 넷은 한 명을 포위하는 남정네였는데, 그 차림새가 몹시 남루했다. 거지꼴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일반인의 모습도 아니었다. 거기다 저마다 허접하게 이가 빠진 단검이나 돌따위를 쥐고 있는 걸 보면 명백한 강도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포위당한 한 명은 리메이의 또래 쯤 되보이는 소녀였다. 예쁘게 치렁치렁 늘어진 백발에 붉은 눈동자를 한 소녀는 포위를 당했는데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흰 셔츠와 검은 제복의 깔끔한 복색에 걸맞는, 그야말로 고고해보이는 태도였다.

물론 지금 상황에선 도움이 안될 것이다. 저렇게 수로 밀리는데 뻣뻣하게 고갤 들고 있으면 되려 약이 오르는 게 불량배들이었다. 물론 그것에 기죽는 녀석들도 있겠지만, 지금 이놈들에게 해당되지 않았다.


'용감하네.'


이런 상황에선 소녀가 아닌 건장한 남성이라도 겁을 집어먹기 마련이다. 헌데 저 소녀는 긴장이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았으니, 리메이는 그저 지켜보기로 했다.


"니년 돈이 많은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엉?"

"없다고 몇 번을 말해."

"그러면 왜 여기까지 따라왔지? 앙? 그냥 존나 따먹어달라고 그런 거냐."


남자 하나가 다가서자 소녀는 으르렁거렸다. 당장에라도 물어뜯을 듯이 노려보니, 그들이 킥킥 웃어댔다.


"어유, 무서워라."

"그러다 한 입 세게 무시겠어, 응?"


이죽거리는 그들을 보며, 소녀는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은빛 마상용 장창이 나타나 그녀의 손에 쥐어졌다. 사내들이 멍때리는 동안 소녀는 그걸 크게 휘둘렀다. 사내들은 한 방에 창에 얻어맞고 나가떨어졌고, 소녀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리메이는 감탄했다. 저런 무기가 있었던 것도 놀랐고, 이런 좁은 곳에서 깔끔한 자세로 창을 휘두르는 그녀의 실력에도 놀랐다. 리메이가 놀라는 사이, 소녀가 기척을 느끼고 그녀에게로 창을 내뻗었다.


"너가 보냈어?"

"응?"


실실 웃던 리메이는 등에 매고 있던 체스말 나이트 장식이 달린 봉을 빼들었다. 그러더니 땅을 쿵 찍으며 손을 내저었다.


"이렇게 내 무기가 있고, 내 몸이 있는데 남을 시키겠어?"

"그래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보니까 혼자서도 잘 하던데."


소녀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곤 리메이를 스쳐 지나갔다.


"같이 놀지 않을래? 재밌는 곳 아는데."

"뭘 믿고?"

"음?"

"너도 이 인간들처럼 내 돈을 노리는 걸 수도 있잖아?"


소녀의 경계 가득한 말에 리메이는 코웃음을 치며 봉으로 그녀를 겨누었다.


"그럼 싸워서 이긴 쪽 말 듣는게 어때."

"뭐……?"

"니가 이기면 그냥 가면 돼고, 만일 내가 이겨도 널 무사히 데려가면 끝 아냐?"

"그게 무슨 억지……"

"자신 없나봐?"


리메이가 노골적인 비웃음으로 도발했고, 소녀는 입가를 꿈틀거렸다.


"지금 내가 들고 있는 게 종이짝으로 보이나 봐? 내가 들고 있다고 가벼워보이는 거야?"

"아-니. 그거 꽤 비싸보이는데…… 주인 인식도 스스로 하고, 무게를 줄여줘도 실린 힘까지 지우지 않는 거 같던데. 게다가 빛의 힘도 언뜻 보이고……"


소녀는 눈을 크게 떴다. 이것이 흔한 건 아니라지만 단번에 파악할 만한 물건도 아니었다. 리메이가 눈썰미가 좋거나, 아니면 사전에 정보를 미리 얻었거나, 둘 중 하나 밖에 없었다. 소녀는 전자의 가능성을 두지 않았다.


"난 리메이. 넌?"

"헤어질 사람한텐 이름 안 밝혀."

"그래-? 이거 어쩌나, 넌 날 따라갈텐데."

"해보시지."


소녀가 선공을 했다. 그 커다란 창을 가볍게 휘둘렀고, 리메이는 그 틈을 파고 들어 그녀의 턱 밑에 봉을 디밀었다. 봉 끝의 말장식이 그녀의 살을 꾹 눌렀다.


"찌르기 기본 자세인 용아인데, 이런 기본기에 당하는 거야?"

"무슨……"

"당한 게 아니라고 우기려고? 내가 맘먹고 찌르면 말이야."


리메이가 봉을 거두고 바닥을 찍었다. 그러자 돌바닥이 쩌적 갈라졌고, 소녀는 침을 삼켰다.


"동작이 깔끔하긴한데, 경험이 아직 없어. 노련하지가 않단 말이야."


소녀는 말없이 노려보았고, 리메이는 히죽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자, 가자."

"어딜……"

"내가 이겼잖아?"

"내가 인정하지 않았어!"

"그럼 일단 놀고 난 다음에 다시 붙던가. 자, 어서. 팔 아파."


소녀는 머뭇거렸다. 그러자 리메이가 그녀의 손을 낚아채고 끌어당겼다.


"앗?!"


소녀가 휘청이더니 리메이의 품에 안겼다. 리메이는 까르르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뭐야, 힘 좀 쓸 거 같았더니…… 여리여리하네?"


그 말에 소녀가 벌개져서 소리쳤다.


"시끄러……!"

"그래서, 네 이름이 뭐야?"

"그건 왜 물어?"

"이제 헤어질 사람이 아니니까?"


리메이의 말에 소녀는 뭐라 반박하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은 방금의 일격으로 패배했고, 우위는 그녀가 점하고 있었다. 그런 단순한 생각을 하며 말했다.


"쥬나 셰플로."








"그랬더니 말이야-"


리메이가 호탕하게 웃으며 얘기했고, 주점의 사람들은 그녀의 이야기 하나로 떠들썩해졌다. 쥬나는 이런 시끌시끌한 분위기는 처음인지라 그저 작은 잔에 담긴 맥주만 홀짝였다. 리메이는 이야기를 끝마치고 쥬나가 앉은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곤 자기 몫의 큰 나무잔을 잡고 술을 쭉 들이켰다.

탕-


"파하- 어때? 니 얘기는?"

"거짓말. 그게 왜 내 얘기야."


시큰둥한 쥬나의 반응에 리메이는 고갤 저었다. 사실 각색한 부분도 없잖아있지만 그녀와의 첫 만남은 거의 액면 그대로 전했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건 리메이의 생각일 뿐, 쥬나는 터무니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언제 비명을 지르며 가녀리게 있었으며, 리메이와 수십 합을 나누는 대결투를 했단 말인가.

모험가가 아니라 소설가가 아닐까 의심하며, 쥬나는 건배 제의를 하는 리메이를 바라보았다.


"누구한테나 그렇게 친근하게 굴어?"

"아무한테나 그러는 건 아니지. 특히 너처럼 특별한 친구에겐 더더욱!"

"만난지 1시간도 안됐어. 특별하긴 무슨……"


쥬나의 경계심이 잔뜩 어린 말에 리메이는 그저 웃었다.


"그런 주제에 잘도 따라왔네."

"그야 내가 졌으니……"

"억지라며?"


쥬나는 뾰로통한 얼굴로 고갤 돌려버렸고, 리메이는 킥킥 웃었다.


"쥬나."

"왜그-"


리메이는 돌아보는 쥬나의 볼을 콕 찍었다. 그러더니 아무일 없던 척 딴청을 피웠다.


"이게 뭐하는 거야."

"응- 스킨쉽?"

"그런 건 다른 애들한테나 해!"

"왜- 나랑 스킨쉽하기 싫어? 응? 우구구, 우리 쥬나 내가 싫어쪄요?"

"애취급하지마!"


보이드 스티드 리메이. 광명창 쥬나. 이것이 두 사람의 첫 만남이었다.








둘은 첫 만남에 비해 상당히 가까워졌다. 몇 번의 투닥거림 속에서 쥬나는 리메이의 활발함에 물들었고, 리메이는 쥬나의 어두운 면모를 볼 수 있었다.

셰플로란 성은 아라드에서 제법 이름 난 가문의 것이었다. 상행, 정치, 전쟁, 그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고 발을 뻗어있는 이 거대 가문은 리메이가 놀랄 정도였다. 돈이면 돈, 영향력이면 영향력, 쥬나는 이 엄청난 가문의 첫 째 딸이었다. 물론 그녀 위로 오빠가 셋이나 있었기에 가문에 결정적인 역할은 하지 못했다. 그러나 떨어지는 콩고물만 해도 대단했으니, 그녀의 돈을 노리고 몰려드는 이리떼가 많았다.

쥬나가 한 번은 자신의 돈을 리메이를 위해 썼다. 쥬나에겐 고작 식사 한 번 정도의 돈이었으나, 리메이에겐 상당한 양이었다. 정말 단단히 모험을 준비할 때나 쓰던 금액이 한 번에 쓰여지니, 그녀는 제법 놀랐다. 그리고 정색하며 말했다.


"스테이크가 아니라 육포여도 맛있게 먹을 거고, 고급 여관이 아니라 마구간이어도 잘 자. 내가 좀 싼티가 나긴 하지만 불필요한 소비 정돈 알 수 있어."


쥬나는 시무룩해졌고, 리메이는 그녀를 다독여주었다. 분명 좋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 호의까지 무시할 정도는 아니었다.


"정말 더러웠어."


리메이는 쥬나를 데리고 싸구려 식당으로 데려왔다. 값싼 포도주와 딱딱한 빵, 건더기가 별로 없는 수프 뿐인 허접한 식단이었지만 쥬나는 불평하지 않았다. 그저 샐러드를 시킬 수 없단 사실이 싫을 뿐이었다. 이런 식사를 내놓는 곳이라면 분명 샐러드도 숨이 다 죽은 채소를 내오고, 상한 소스를 쓸 게 분명할 것이다.

어쨌든 쥬나는 이 식사 자리에서 자신이 겪었던 일을 얘기하고 있었다. 바로 자신의 몸 아니면 돈을 노리는 이리떼에 대한 얘기! 어릴 때 가장 먼저 접근한 건 친절하게 웃으며 다가와 약을 먹이고 납치한 남자였다고 말했다.


"우리 아버지를 안다면서 나에게 뭔가를 줬지. 그게 설마 미약을 탄 건 줄도 모르고 말이야."

"언제?"

"8살 때 쯤?"

"우웩, 정말 더럽네."

"아무튼 그때 납치되긴 했지만 경호원들이 구해줘서 큰일은 없었어. 하지만 몸도 안자란 애한테 미약을 써버렸으니, 열이 엄청나서 죽을 뻔했대."

"그 남자는 어떻게 됐어?"

"어떻게 되긴……"


쥬나는 빵을 들어 반토막을 내버렸다.


"또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어. 웬 아저씨가 갑자기 나한테 반했다며 청혼을 하지 뭐야. 상상이나 돼? 옷 좀 좋은 거 입은 아저씨가 말이야, 10살도 안된 애한테 청혼을 했어!"

"세상에…… 미친 거 아냐? 지 딸 뻘 되는 애한테 청혼을 했다고?"

"그러니까 말이야. 다행히 내가 나서지 않아도 알아서 해결 되더라고."

"어떻게?"

"오빠들이 해결했지."


쥬나는 수프를 한 숟갈 떴다. 리메이는 포도주를 마셨고, 쥬나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후론 어떤 일을 더 겪었느냐가 전부였다. 그런데 하나같이 기상천외한 것들이어서 리메이는 그녀가 얘기하는 내내 통탄을 금치 못했다. 이야기가 끝나고, 쥬나는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속 얘기를 해본 게 얼마만인가. 아니, 애초에 그런 얘기를 나눌 사람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혼자였다. 분명 돈은 있었지만 사람은 없었다. 가족? 그들은 전부 바빴다. 쥬나를 챙겨줄 시간에 사업에 신경쓰는 게 이득이었다. 보모도 필요없어지게 됐을 땐 그녀는 혼자 나다녔다. 무구를 사서 혼자 연습하고, 혼자 훈련했다. 그러나 오직 교본만이 전부였고, 참된 스승은 없었다. 전부 돈에 눈이 멀어서 이상하게 가르치거나 실전과는 거리가 먼 대련만을 했다. 다행히 무구의 힘으로 어느 정도 보정은 됐고, 제 한 몸 지키기엔 충분한 정도가 됐다.

그러나 곁에 누군가 없단 건 큰 상실이었다. 돈으로도, 힘으로도 메울 수 없는……


"난 혼자 자랐어."


리메이는 쥬나와 정반대였다. 볼품없는 가문에서 형편없이 자라났다. 그나마 그녀의 부모님이 모자람없이 키워주었지만 대전이가 모든 걸 뒤바꿔놓았다. 그녀의 집은 시궁창 깊은 곳으로 떨어졌고, 그녀의 부모님은 버섯 포자에 뒤덮여 죽어버렸다. 그렇게 홀로 남게 된 리메이는 시궁창 사람들에게 키워졌다.

말보단 주먹. 그나마 대화를 해도 욕이 절반에 성적인 농담이 나머지를 차지하는 저급한 수준. 물 대신 술을 마시고 눈물 대신 피를 흘리는 공간. 리메이는 그곳에서 오직 실전만을 겪었다. 한 번은 사냥개한테 물려죽을 뻔 했으며, 어느 땐 도둑으로 오인받아 맞아죽을 뻔 했다.

그녀는 야생을 살아왔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남을 정도로 강해질 수 있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리메이는 수많은 사람을 거쳤다.

봉술의 스승인 자, 배고픈 자신을 먹여키워준 자, 이런저런 일거리를 알려주는 자, 앞서서 폭력을 막아준 자, 옷을 입혀준 자, 무기를 만들어 준 자, 다른 사람에게 소개를 시켜준 자, 인생의 경험을 알려준 자, 같이 술을 마셔준 자……

리메이는 그들 덕분에 무사히 자라났고, 강해질 수 있었다. 전장을 나다니며 공허의 군마, 보이드 스티드란 별명도 얻었다. 그녀는 잠깐이지만 유명해졌고, 더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이 부분에서 쥬나는 리메이를 부러워했다. 자유분방, 수많은 친구. 그녀가 얻을 수 없는 걸 리메이는 갖고 있었다.


"대단해."


쥬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만일 자신이 그런 상황에 처했다면 무사했을까? 아마 꼼짝 못하고 죽지 않았을까.

반대로 리메이는 쥬나를 부러워했다. 그만한 배경이라면 아마 지금보다 더 강해지고 유명해지지 않았을까. 아니, 어쩌면 이렇게 살지 않고 좀 더 호의호식하며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둘다 서로가 되길 원하지 않았다. 각자의 길이 있단 걸 모를 정도로 어리지 않았다. 다만……


"우리가 서로 바뀌었다면 달라졌을까."


리메이는 그렇게 화두를 던졌고, 쥬나는 수프 그릇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지 궁금하긴 하다."


둘은 서로를 보며 웃었다.


"아아, 정말. 그보다 내가 산 식사는 어때."

"음- 별로."

"뭐?! 기껏 돈 털어서 사줬더니만- 다시 뱉어!"

"그런게 어딨어. 치사하게."

"별로라며! 그럴 땐 예의상 맛있다고 해주는 거야!"

"진짜 별로인데 거짓말을 해야해?"

"야~!"








"이건……"

"선물."


쥬나가 내민 건 리메이의 것과 똑같이 생긴 봉이었다. 다만 조금 더 색이 짙었고 범상치 않은 기운이 흘렀다. 리메이는 놀란 얼굴로 그녀의 선물을 받아들고 살폈다. 처음 쥬나의 창을 알아보던 눈썰미는 그 봉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그 안에 담겨진 마법의 힘은 산전수전 다 겪은 리메이조차 놀라게 만들었다.

가장 놀란 건 봉의 균형이었다. 사실 이제까지 쓰던 봉은 첫 무기이자 정성이 담긴 것이어서 계속 썼다 뿐이지, 그녀에겐 잘 맞지 않았다. 그나마 익숙해져서 무게 중심에 맞춰 싸웠을 뿐이다. 그런데 그녀가 준 것은 들자마자 다르단 게 느껴졌다. 손에 쥐어보고 휘두르니, 그녀에게 꼭 맞춰져서 만들어진 듯 했다.


"부담스러워."


리메이가 이렇게 말하자 쥬나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렇게 따지자면 너가 니 친구들 소개해줄 때도 부담스러웠거든?"

"야, 그거랑 이게 같아?"

"내가 보기엔 같은데 뭐. 그냥 받아."

"하지만……"

"아니면 유명해져서 나중에 갚던가."


리메이는 봉을 한 번 휘둘러보더니 히죽 웃었다.


"그러다 내가 너 모른체 하면 어쩌려고?"

"그럼 혼내줘야지."

"어쭈, 이게 몇 번 봐주면서 싸웠다고 기어오르려 하네?"


까르르 웃는 둘은 더 깊은 사이가 됐다. 누구보다 친해졌고, 안좋은 일이 있다면 가장 먼저 풀어놓았다. 같이 모험에도 나서서 모험가로써의 명성도 차근차근 쌓아갔다. 그러면서 서로 부족한 점을 보완해주었다. 리메이는 쥬나에게 이것저것 알려주며 경험을 쌓게 해주었고, 쥬나는 리메이에게 여러 장비나 가문의 힘을 빌려 다른 귀족의 억압을 막아주었다.

상부상조, 그야말로 명콤비!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던 둘은 위기에 봉착했다.

그건 바로 재능의 차이였다. 아무리 리메이에게서 배웠다지만 쥬나는 재능이 없었다. 희귀한 장비에 의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리메이는 원체 능력이 뛰어났다. 그런데 무구까지 훌륭하게 뒷받침해주니 그야말로 날개 달린 호랑이! 그녀는 완벽하게 비상했다.

그 유명세에 여기저기 초청하는 손길이 많았다. 안그래도 인맥이 넓은 그녀인지라 소문 역시 빨리 퍼진 것도 한 몫 했다. 그래서 리메이는 종종 자리를 비웠고, 쥬나는 아쉬워하면서도 내색하지 않았다. 친구가 잘 되는 건 좋은 일이었다. 아니

연모하는 사람이……


"아- 바뻐 죽겠어 정말……"

"고생 많았어."


쥬나가 리메이의 어깨를 주무르며 살갑게 붙었다. 리메이는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삐죽였다.


"피곤해- 쥬나 없었으면 어쩔 뻔 했을까……"

"엄살은……"

"아냐, 진짜 힘들다니까? 갑자기 배불뚝이들이 와서 이런저런 격식을 차려야하지 않나, 분위기 전부 깨고 말이야."


품에 안기는 리메이를 쓰다듬던 쥬나는 볼을 발갛게 물들였다.


"괜찮은 사람 없었어?"

"괜찮은 사람은 무슨…… 다 못난이 똥개들이야."


다행이다.

쥬나는 안심했다. 만일 그녀에게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생긴다면……. 안그래도 많은 사람이 곁에 있는 그녀였기에 쥬나는 항상 불안했다. 그 중에 당연히 남자도 있었다. 그들 중 리메이를 짝사랑 하는 사람이 없다고 어떻게 단정지을까. 바로 자신처럼!

무엇보다 그녀말곤 쥬나에겐 친구가 없었다. 리메이는 말주변도 좋고 반응도 좋았지만 쥬나는 영 그런 쪽에 재능이 없었다. 그래서 쥬나가 조금씩 고립되가는 동안, 리메이는 점점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갔다.

그래도 아직까지 리메이가 좋아하는 사람이 없단 것을 위안삼았다. 그러나 이 위안도 얼마 안가 박살이 나고 말았다.







최근 들어 리메이가 쥬나와 떨어져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래서인지 쥬나는 불안감에 휩싸였고, 강박 증세에 시달렸다. 물론 리메이는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언제나처럼 다른 사람과 놀다가 돌아왔다. 그런데…… 이번엔 이상했다. 그 이질감을 느끼기 시작한 건 리메이가 누군가에 대해 얘기를 하기 시작해서였다.

갈룬이란 이름의 마창사. 처음 그에 대한 얘기를 했을 땐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다. 리메이가 이야기를 할 때 다른 사람의 이름을 들먹이던게 하루이틀이 아니니까. 그러나 같은 사람의 이름을 계속 언급했던 적은 없었다. 그것도 행복한 표정으로, 긍정적인 얘기만 꺼냈던 적은 더더욱!

쥬나는 불안했다. 부디 이번에도 그저 그런 불안함이기를…… 쥬나에게 어깨를 주물러지던 리메이는 뺨을 붉게 물들이며 말했다.


"나 좋아하는 사람 생긴 거 같아."


쥬나의 가슴이 쿵 뛰었다. 어깨를 쥐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좋, 아하는 사람?"

"엉. 저번에 괜찮은 사람 없냐고 했었잖아."


리메이는 그렇게 말하며 갈룬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털어놓았다. 은근히 분위기를 잘 잡는다는 둥, 말투가 너무 느끼해서 미끄러지겠다는 둥, 뭔가 험담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쥬나는 그 속에 담겨진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리메이의 눈에선 사랑이 옅게 감돌았고, 입가가 부드럽게 늘어져있었다. 보기 드문 호감의 표시. 쥬나는 그걸 본 순간 처참해졌다. 이제까지 옆에 있던 자신은 뭐가 되는가. 대체 자신은 뭘 위해서 그녀 곁에 있었던 건가.

그 날 이후로 리메이는 갈룬과 종종 같이 지내는 모습을 보였다. 쥬나는 이를 뿌득 갈며 자기 역시 적극적으로 표현하기로 마음먹었다. 은근슬쩍 깊은 스킨쉽을 했고, 갈룬과 자신을 비교하며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리메이의 반응은 시큰둥 했다. 오히려 쥬나가 그럴수록 갈룬에 대한 사랑이 깊어지는 것 같았다.

쥬나는 다급했다. 그래서 뭐라도 해야겠다 싶었다.


"리메이."

"응-"


평소라면 살갑게, 얼굴을 보며 대답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고개도 안돌리고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쥬나는 무언가 올라오는 걸 꾹 참고 말했다.


"넌 그 사람이 좋아?"

"그 사람? 누구? 갈룬?"

"어."

"뭐…… 나쁘지 않지."

"어디가 어떻게 좋은데?"

"너가 말하면 알아?"


쥬나는 퉁명스러운 말투 속에서 거북함을 느꼈다. 어쩐지 그녀와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다. 왜? 같이 씻고 밥먹고 하기도 했던 사인데 갑자기 왜? 그 이유는 하나였다. 바로 갈룬이란 작자 때문에, 그 놈이 리메이를 가로챈 것이다.


"말 못할 건 또 뭔데."

"아, 됐어."

"왜! 말해줘!"

"왜 소리를 질러?"


리메이가 눈을 가늘게 떴고, 쥬나는 으득 이를 물며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왜, 그 놈이 어디가 어떻게 좋은데! 나보다 좋아? 응? 나보다 돈이 많았어? 아니면 좋은 걸 사줬어?"


자신을 깔아뭉갠 쥬나를, 리메이는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그 시선을 본 쥬나는 화들짝 놀라 움츠러들었다.


"왜…… 왜 그렇게 봐?"

"내가 이제까지 말을 안했지만, 너 너무 노골적이야."

"뭐가……?"

"눈치 못챘을 거 같아? 미안하지만 난 동성애자가 아니야. 여자보단 남자가 더 좋다고."

"그게 무슨 소리……"

"이제까지 나한테 눈치주고, 이상한 질문 하고…… 그 정도도 모를까봐? 몰래 내 뒤 밟는 것도 알고 있었어. 정보도 캐고 다니고. 내가 이전에 어디서 살았는지 잊었어? 게다가…… 내가 너 돈 때문에 만난줄 알아? 대체 무슨 자격으로 그따위로 말하는 거야? 질린다 정말."


리메이는 쥬나를 밀치고 숙소를 벗어났다. 쥬나가 가지말라고 소리쳤지만 리메이는 듣지 않았다.

그렇게 리메이를 보낸 뒤로, 쥬나는 같은 곳에 앉아있었다. 하루, 이틀, 수척해진 쥬나는 비척비척 걸었다. 거리에선 리메이에 대한 얘기가 오갔고, 오늘 그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파티가 진행된다고 했다. 쥬나는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업적? 자신과 함께 쓰러뜨렸던 거대 나믈룬보다 더 대단한 일인가?


"마창사 갈룬이란 사람과 베히모스를 구했다며?"

"사도 로터스 처단에 일조했다고 들었는데."


그 말에 쥬나의 안색이 더 어두워졌다. 자신과 함께 한 일이 아니었다. 비척거리던 쥬나는 리메이가 자주 다니던 식당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나오는 리메이와 갈룬을 본 쥬나는 멍하니 손을 뻗었다. 그때,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이 년 봐라."


평소라면 뿌리쳤을 손이었지만, 쥬나는 수척해져있었다. 그래서 멍청하게 그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너가 리메이 뒤 캐고 다니던 새끼냐?"

"얼굴 왜이래? 좀 반반하게 생겼던 거 같은데……"

"알게 뭐야. 야, 따라와."

"아, 아……"


쥬나는 힘없이 끌려갔다. 멀어져가는 리메이의 뒷모습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닿지 못하고 그대로 골목으로 빨려들어갔다. 사내들은 쥬나를 사정없이 겁탈했다. 침을 뱉고, 욕을 해댔다. 쥬나는 힘없이 그들에게 당하고 널부러졌다.


"한 번만 더 까불어봐. 그땐 창녀촌에 팔아버릴테니까."

"가자."


쥬나는 숨죽여 울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보았다. 이제까지 리메이와 잡았던 손, 그 손을 스스로 맞잡았다.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을, 장소를 떠올리고, 추억했다. 그 기억이 쥬나의 가슴을 찢어발겼다.

쥬나는 울고 또 울었다. 차라리 만나지 말 걸. 그때 그냥 매몰차게 가버릴 걸. 처음부터 모르는 사이었어야 했는데……


"리메이……"


울었다. 울음이 그치지 않았다. 눈물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고, 꺽꺽대는 소리만 나왔다.


"리메이……!"


손톱이 닳아버리고 손끝에선 피가 났다. 바닥을 긁어대던 손은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리…… 메이……!!"


그렇게 울부짖던 쥬나는 더 이상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저 힘없이 어디론가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 방향에 뭐가 있는지는 그녀도,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다.







리메이는 고갤 돌렸다.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것 같았다. 시선이 향한 곳엔 갈룬이 예쁜 여자들 사이에 둘러싸여있었다. 리메이만큼 유명해져서 그런지,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그 모습을 본 리메이가 볼을 뾰로통하게 부풀리니, 그가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바람둥이."

"미안, 미안."


리메이는 기분좋게 웃었다. 그리곤 그의 품에 안겼다.


"그런데 네 파트너는 어딨어?"

"누구?"

"그 광명창이라고……"

"아- 글쎄? 알아서 잘 살겠지 뭐."

"그래…… 아, 저기도 맛있는 집인데."

"어 정말? 크레프랑 한 번 가봐야겠다."


둘은 사이좋게 저물어가는 해로 걸어갔다. 둘은 누구보다 행복해보였고, 햇빛만큼이나 따스해보였다.



More Creato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