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 기계 소녀
Added 2021-04-08 07:39:37 +0000 UTCL-seekker. 기동 시작.
지잉-
선홍색 빛이 쏟아지며 동공의 초점이 조절되기 시작했다. 핑그르 도는 렌즈가 곧 제자리를 찾더니, 눈의 주인에게 시야를 제공해주었다. 기계적인 동공이 무너진 건물 한 쪽을 쳐다보자, 녹색의 글자가 떠오르며 어떤 피해를 입고 건물이 부숴졌는지 프로필이 새겨졌다. 눈높이 정도 되는 건물을 무심하게 보던 시선은 머릿속을 울리는 음성에 정면을 보았다.
“들려, 엘?”
주홍색 양갈래 머리 같은 금속 부분이 반짝였다.
“잘 들려요.”
대답한 건 기계의 눈과 금속 머리칼의 주인인 여성형 로봇 에루세르크였다. 본체 명칭은 엘-시커였지만 그녀를 만든 발명가 카르단이 너무 딱딱하다며 에루세르크란 이름으로 따로 부르기 시작했다. 종국엔 애칭인 엘이란 이름까지 덧붙였다.
그녀의 기체 역시 카르단의 개인 의견이 잔뜩 깃들었다. 전체적인 모습은 그야말로 소녀나 다름없었다. 관절 부분처럼 어쩔 수 없는 부분을 제외하곤 말이다. 무엇보다 주홍빛 부츠와 긴 장갑, 비키니나 치마 같은 추가 장갑은 적색의 페인트칠을 하고 나머진 회색빛 그대로 두었기에 노출이 많은 옷을 입은 것처럼 보였다. 그 이유 중 하나가 그녀가 인간을 본따 만든 것이고, 흉부 부분이 특히나 발달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은 이 부분에 대해 수군거렸다. 그녀는 전투 병기라기엔 너무 가냘퍼보였다. 하물며 제국군의 병기들과 적대하는 거대 병기인데! 누군가는 적들을 몸으로써 만족시켜주는 ‘섹스봇’을 만든 게 아니냐며 손가락질까지 해댔다.
하지만 카르단은 개의치 않았다.
‘딸과 같은 아이다.’
그래서 음파를 송수신 하는 부분을 머리카락처럼 만들고, 에너지를 저장하는 부분을 크게 만들어 풍만한 가슴처럼 보이게 했다. 하반신 장갑을 치마처럼 감싼 이유는 통풍을 쉽게 하여 체내의 열을 낮추기 위함이고.
비주얼과 기능성 둘 다 잡기 위한 것! 하지만 카르단은 그걸 일일이 밝히지 않았다.
지금 엘의 성과는 엄청 났기 때문이다. 굳이 설명을 할 필요도 없이, 엘은 연방군 최고의 업적을 가졌다. 특히 홀로 200에 달하는 적 기체를 파괴한 ‘라슬터 전투’에선 연방군의 궤멸 위험을 홀로 막아내는 기염을 토했다.
이젠 에루세르크를 손가락질 하는 이는 거의 사라졌다. 몇몇은 축소 버전 에루세르크 인형을 만들어 팔기까지 했다. 카르단은 만족했다. 그녀의 가치가 입증됐기 때문이다.
“그럼 이번에도 수고해, 엘.”
“네.”
대답을 한 엘은 반짝이며 솟구친 양갈래 머리가 내려앉자, 한숨을 쉬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분명 전쟁 병기로 개발됐지만, 인공지능까지 전투에 적합한 건 아니었다. 그녀는 적 기체를 부술 때마다 그 안에서 비명을 듣는다. 모두가 엘과 같지 않았다. 제국군의 기체는 평균적인 전투력에 양산이 가능한 대신, 사람이 직접 조종해야만 했다. 원격 조종은 감이 떨어진다는 것도 이유였다.
엘은 그걸 아쉬워했다. 격렬한 전투에선 상황을 봐주기 어려웠다. 그래서 기체와 함께 조종사가 죽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따금 피가 새어나오기도 하고, 끔찍한 모습이 노출되기도 했다. 그때마다 엘은 회로가 마비되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꼭 이래야만 하는 건가. 힘으로 억눌러야만 모든 것이 해결 될까.
하지만 엘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자신은 전투를 위해 만들어졌다. 그런데 그 목적에 의문을 품는다면 무슨 짓을 할 게 분명했다.
‘해야만 한다.’
무엇보다 현 제국군의 만행은 지금 자신이 만들어내는 희생보다 더 컸다. 이렇게 싸우다 죽는 건 새발의 피라 할 정도로, 많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무력으로 통일하려는 제국과 그에 맞서는 연방군의 싸움 때문이었다.
제국군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했다. 지금은 엘이 압도하고 있었지만 더 작은 나라들의 연합인 연방군이 감당할 수 있는 전투력이 아니었다. 만일 엘이 없었다면 지금보다 수 천 배나 되는 희생이 생겼을 것이다.
그렇다고 연방군이 옳다는 것도 아니었다. 엘에게 주입된 프로그래밍은 연방군의 일방적인 세뇌가 대부분이었다. 카르단이 몇 가지 조치를 하지 않았다면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전쟁병기가 됐을 것이다.
‘필요악.’
엘은 스스로의 위치를 그렇게 바로 잡았다.
기잉-
엘은 관절의 삐걱거림 없이 부드럽게 나아갔다. 정말 작은 소리라고 할 만한 구동음 외엔, 인간이 걷는 것 같았다. 엘은 그렇게 나아가면서 주변을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곳은 연방군과 제국군의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도시였다. 전쟁이 일어난지 1개월도 안됐는데, 이곳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포착됐단 보고가 들어왔다. 처음엔 이곳에서 쓰레기를 먹으며 살아가는 생존자들이라 생각했는데, 그 규모가 제법 컸다고 한다.
거기다 지금껏 탐지되지 않은 형태의 기체가 감지됐단 말도 있었다.
제국군이 가진 인적, 물적 자원이면 얼마든지 새로운 기체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하물며 에루세르크에게 대항할 기체를 만드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엘은 출격 이전에 정말 꼼꼼한 점검을 받았다. 가랑이 사이, 음부의 위치에 해당하는 연료주입구나 가슴(연료저장고)에 내장해둔 연료배출구에서 누수 현상은 없는지. 항문의 위치에 해당하는 부분인, 연료의 찌꺼기를 배출하는 폐기물 배출구도 깨끗하게 닦았다. 핏줄을 대신하여 연료를 흘리는 연료관에 막히는 건 없는지도 확인하고, 관절 부분은 특히나 신경 써서 정비했다.
그 외에도 내장된 모든 무기에 대한 점검도 끝마치고, 추가적인 장비도 배치한 상태. 엘은 일이 잘못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지금도 적 기체가 셋이 감지되고 있었다. 어설프게 은폐를 하고 있는 세 기체는 전부 병사형이었다.
기껏해야 총격이 전부. 혹시나 대전차탄 같은 다른 중화기가 있다 해도 상관없었다.
피슝-
연기를 뿜으며 날아오는 탄도체. 엘은 그것이 발사되기도 전부터 인지하고 있었다. 그녀의 센서가 잡아낸 탄도체에 의하면 대전차탄이 분명했다. 애초에 그녀의 회색빛 생체 장갑에 적중돼도 조금의 상처도 나지 않는다. 물론 그걸 모를 만도 했다.
휙-
몇 번의 구동만으로 경로에서 벗어나 탄을 피했다. 지금처럼 엘에겐 웬만한 무기는 통하지 않았다. 미리 감지하고 피해버리기 때문! 함정을 파놓아도 마찬가지였으니, 매복도 큰 소용이 없었다.
‘이상해.’
엘은 단숨에 숨어있는 적 기체에게 달려갔다. 그 사이 다른 두 기체가 미사일을 쏘려 조준하는 것이 감지됐다. 엘은 눈앞의 기체를 노려보다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폈다. 그 순간 주변에 퍼져나가는 전자기장! 발달한 기술로 인해 기체의 움직임까지 마비시킬 순 없었지만, 그들의 무기는 무력화할 수 있었다.
12기체 이상 있을 때 쓰라 당부했지만 정식 명령이 아니었기에 엘은 가볍게 넘겼다. 어차피 수십 기체가 나타나도 무기 하나 없이 박살낼 수 있을 정도의 기능이 있었으니까!
펑-
그때 조종실이 열리면서 조종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하늘을 향해 뭔가를 터뜨렸는데, 그 붉은 폭죽을 보던 엘은 안테나를 가동시켰다.
삑-
음파가 퍼져나가면서 주변 탐지가 시작됐다. 수십 킬로미터까지 감지되는 예민한 파동은 언제나 틀린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오류가 의심됐다.
‘하나?’
범위가 넓은 만큼 세세한 것까지 볼 순 없다. 그래서 대략적인 수만 알 수 있었는데, 그녀의 감지 범위에 잡힌 건 하나뿐이었다.
엘이 조종사를 내려다보니, 그가 기겁하며 전투 수트에 부착된 부스터로 긴급 탈출을 시도했다. 딱히 그를 죽일 필요가 없었기에 병사용 기체만 박살냈지만, 조종사에겐 다른 뜻으로 전해졌나보다. 기겁하며 날아가다 박살나는 기체를 보며 비명을 질러댔으니 말이다.
‘하나.’
제국은 멍청하지 않다. 고작 세 기체를 매복시켜놓고 하나를 출두했단 건 그만큼 그녀와 대적할 수 있단 소리리라. 그 증거로 나머지 두 기체도 쿵쿵거리며 후퇴하고 있었다.
엘은 이 변수를 보고할까 생각했다.
‘괜찮겠지.’
어차피 그녀가 보고 듣고 느낀 기록은 본부로 복귀할 때 자동 보고된다. 이러니 일일이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괜히 연방군에 우려만 주게 될 것 같기도 했다.
‘후우.’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순 없었다. 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 기체가 다가오는 방향을 보았다.
기잉-
동공의 초점이 조절되었다. 좀 더 먼 곳까지 볼 수 있게 배율이 바뀌니 방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지평선이 보였다. 그곳에서 걸어오는 건 역시 단 하나였다. 그런데 그 형태가 조금 달랐다. 보통 제국군의 병사형 기체는 더 많은 장탄을 위해 화기를 장착한 두 팔이 거대하다. 그 외엔 원활한 이동과 안정성을 위해 하반신에 크롤러(궤도)를 배치하거나 4족 보행형태로 만든다. 그건 지휘형 기체나 다른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언뜻 봤을 때 흙먼지에 가려진 음영은…… 여성처럼 보였다.
‘설마?’
지금까지 인간형 기체는 엘이 유일했다. 거대한 형태로 인간 형태를 유지하기엔 기술을 떠나 조종이 문제였다. 엘은 우연에 가깝게 만들어진 인공 지능이었다. 그래서 엘과 같은 기체를 양산하지도, 제국에서 모방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잠깐 불길하다 생각했던 엘은 위험 감지 센서가 울리는 걸 느꼈다. 이건 주변에서 과한 전자 신호나 열기가 느껴지면 울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주변에선 딱히 울리는 게 없는데-
번쩍-
멀리서 보았던 음영에서 빛이 터졌다. 위험 센서에 연결된 자동 반격 시스템이 가동하면서 엘의 몸이 옆으로 틀어졌다.
치익-
강화된 장갑이 아닌 생체 장갑이라지만 스친 것만으로도 손상이 일어났다.
‘퇴각해야해.’
적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했다. 성과 없이 돌아갈 수는 없었지만 팔을 스친 광선은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이대로 도망가야-’
파직-
퉁-
이번에도 센서가 감지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번엔 단순한 광선이 아니었다.
엘은 자신의 턱 밑을 스친 주먹을 보았다. 자신과 같은 매끈한 회색빛 장갑, 그 위를 감싼 새까만 보호 장갑이 덮인 팔. 그건 분명 인간의 형태였다. 그리고 나풀거리는 금색의 선과 붉은 안광이 보였다.
‘나……?’
탓-
스쳐지나간 두 기체. 엘은 상대의 등을 쳐다보았다. 이젠 부정할 수 없는 정보가 입력됐다.
인간형 기체가 있다! 뒷모습은 여지없는 인간의 형태였다. 검은 보호 장갑, 그것들은 엘처럼 부츠나 치마처럼 옷의 형태로 구현됐다. 거기다 방금 본 것이 시각 센서의 오류가 아니라면……!
기잉-
검은 장갑 기체가 돌아보았을 때, 엘은 움직일 수 없었다.
다르다. 장갑의 색상도, 머리칼(로 추정되는 안테나)도, 들고 있는 무기도 달랐다.
그러나 같다. 키도, 얼굴도, 몸매도, 전부 똑같았다.
“안녕?”
심지어 목소리도 똑같았다. 엘은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이 금발의 여성 로봇을 째려보았다. 그리곤 언제라도 전신에 설치된 무기를 쓸 준비를 했다. 전투는 싫어하지만 무조건적인 희생도 싫었다. 엄청난 변수를 눈앞에 두고 자비를 운운할 순 없었다.
처컹-
그때 여성 기체가 손을 펼쳤다. 손바닥에서 번쩍이는 그것은 엘의 장갑을 손상시킨 광선이 분명했다.
“인사를 하고 있는데 매너 없이 그게 뭐야?”
둘은 그 상태로 대치하였다. 조금의 기동도 없었다. 둘다 약간이라도 움직인 순간 전투가 시작된단 걸 알았기 때문이다.
1분 12초. 이 시간이 흐른 후, 엘이 먼저 입을 뗐다.
“너는 뭐지?”
여성 기체는 입을 쭉 당겼다. 생체 금속임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그녀의 미소는 기계답지 않게 부드럽게 그려졌다.
“다크네스라고 해. 개인적으로 다네스라 불리는 게 좋은데 말이야.”
엘은 그저 노려보기만 했다. 그녀가 대꾸도 없자, 다네스는 큭큭 웃으며 말했다.
“아, 내 이름이 궁금한 게 아니라 내 정보가 궁금했던 건가? 너라면 적 기체에게 그런 걸 넘겨주겠어?”
다네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손을 거두었다. 갑자기 손을 거두니 엘의 사고 회로가 복잡해졌다. 혹시 다른 무기라도 있는 걸까. 그게 아니고서야 그렇게 위력적인 걸 거둘 이유가 없었다. 여전히 경계하고 있는 엘을 보며 다네스는 허리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할지 생각 중이지? 기습을 할까, 아니면 감지되지 않은 복병이라도 있나, 그것도 아니면 이것 자체가 심리전인가?”
그녀가 말한 대로 엘은 혼란스러웠다. 바로 교전을 해야 했지만 이대로 넘기기엔 켕기는 게 많았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고민하지? 넌 전투병기야. 이거 보이지?”
다네스는 한쪽 팔에 새겨진 제국군의 문양을 보여주었다.
“적 기체 함락. 그게 네 임무잖아. 그러면 싸워야지?”
참으로 요망한 미소. 엘은 낯설었다. 입력되지 않은 기분. 감정선에 오류가 생긴 것 같았다.
찰칵-
그때 다네스가 주먹을 뒤로 뺐다. 엘은 그걸 인식하였으나 반응이 늦었다.
파캉!
다네스와 엘의 거리는 몇 걸음이나 떨어져 있었다. 주먹이 닿지도 않을뿐더러, 거리를 좁히기엔 시간이 걸렸다. 그걸 전부 무시한 공격! 다네스의 주먹이 엘의 배에 꽂혀버렸다.
‘크?’
광학 병기도 예측한 엘이 다네스의 공격에 반응하지 못했다. 심지어 광선보다 느렸는데! 그 이유는 그녀와 같은 형태의 기체가 근접거리에서 벌이는 공격이 입력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건 연방군조차 예측하지 못한 것이다. 하물며 엘이라고 예측할 수 있었을까!
꾸드득-
기습은 어쩔 수 없었다. 그만큼 다네스의 속도는 대단했다. 그러나 다른 문제가 있었다.
‘순환 장치가 역류 했어……!’
인간으로 치면 내장 기관이 설비된 곳에 약간의 손상이 가해졌다. 연료를 순환시켜 에너지를 만드는 공간이 말이다!
엘의 몸이 뒤로 밀려갔다. 타격 이후 피해 상황을 계산하던 엘은 다네스의 반대쪽 손을 인지했다. 살짝 쥐어진 주먹. 똑같이 타격을 하려는 것 같았다.
‘중심을 잡고, 한 손으로 방어한다.’
뒤로 기울어지기 전, 어깨 부분에서 부스터가 뿜어졌다. 이어서 날아오는 주먹의 경로에 자신의 손을 옮기-
쾅!
그러나 공격은 정면에서 오지 않았다. 등 뒤에서, 허리를 반쯤 접어버리는 충격이 가해졌다. 엘이 고개를 삐걱 꺾었다. 등 뒤를 타격한 건 광선이었다. 처음 맞았던 것에 비하면 약했지만, 그녀를 경직시키기에 충분한 피해를 주었다.
그 사이 다네스의 반댓손이 주먹을 그러쥐었다. 이번에도 같은 부분!
그극-
그러나 피해는 차원이 달랐다. 다네스가 작정하고 휘두른 주먹은 에너지 기관에 다시 충격을 주었다.
‘이상해!’
내장 장치의 오류. 그 느낌이 또 한 번 느껴졌다. 그런데 이건 정말 이상한 신호였다. 머리의 인식 장치가 마비될 것 같은 기묘한 신호! 그건 엘이 전혀 모르는 것.
고통이었다.
쿵-
그 잠깐의 오류 때문에 엘은 주저앉았다. 다네스는 눈을 반쯤 까뒤집으며 말했다.
“좋은 표정이네.”
“뭐……?”
“그 표정. 정말 좋아.”
엘은 무슨 말을 하나 싶었다. 그래서 자기 얼굴을 만지작거리면서 자가 인식을 해보았다. 현재 얼굴의 움직임을 인식하고 인식 체계에서 그려보았더니……
일그러졌다. 그건 분명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간혹 적 기체에서 큰 부상을 입고 나온 조종사의 표정이 그러했다. 문제는 엘에게 이런 표정을 짓는 것이 입력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번엔 황당함에 물들었다. 다네스는 소름끼치는 미소를 보였고, 엘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대체 뭐……”
“이상한 걸. 그간 본 것과 첩보원의 정보를 토대로 널 모방했는데. 난 알고, 넌 모르다니. 이상하지 않아?”
“무슨 소리야……?”
“난 느껴져. 기계에겐 감정이 없대. 감각도 없다는데 말이야. 난 왜 전부 느껴졌을까?”
엘은 이를 까득 물며 두 손을 양옆으로 펼쳤다. 오른쪽 팔뚝이 팔꿈치에서부터 세로로 갈라지며 검이 만들어졌다. 왼팔의 위아래로 내장된 미사일과 총구들이 나타났다.
츠악!
열과 진동으로 절삭력이 강해진 검이 다네스에게 휘둘러졌다. 다네스가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그 잠깐 동안 관찰에 성공한 엘은 그 속도의 이유가 금속답지 않은 탄성과 부스터의 보조, 정확한 자세란 걸 알게 됐다.
‘열 감지가 될 거야.’
엘의 왼팔이 다네스를 겨누고 미사일을 쏘았다.
퉁- 퉁-
서른 발에 달하는 미사일. 그건 둘의 덩치보다 한참 작았지만 하나하나가 작은 핵탄두라고 봐도 좋을 만큼 위력적이었다. 다네스는 검지와 엄지를 비비다 손을 흩뿌렸다. 순간적으로 뿜어진 전자기가 미사일들의 기폭 장치를 건드렸고, 그것들은 허공에서 폭발했다.
이어서 엘이 방금 보았던 다네스의 행동을 모방했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속도에 근접해서 움직일 수 있었다. 다네스를 단숨에 토막내버릴 움직임! 실상 방금 다네스의 말에 엘은 충분한 정보를 모았다.
첩자가 있다!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수확이었다. 그래서 다네스를 끝장낼 생각이었다. 엘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다네스는 엘의 공격을 쉽게 피해버렸다. 그것만이 아니라 오른팔의 위쪽 팔뚝을 잡아채면서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처음일 거야.”
다네스가 그렇게 말하며 엘을 잡아당겼다. 엘이 검을 휘둘렀을 때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래서 무게 중심이 앞으로 향해있는 엘은, 훨씬 힘이 강한 다네스에게 딸려들어갔다. 그리고 그렇게 기울어진 엘의 뒤로, 다네스가 들러붙더니 그대로 매미처럼 매달렸다.
다네스의 왼팔이 그녀의 목을 감쌌다. 목을 조르자마자 엘은 오른팔의 검을 휘두르려했다. 그러자 다네스의 오른팔이 겨드랑이 밑으로 파고 들더니, 엘의 오른팔이 위로 솟구치게 끌어안았다.
“큭?”
다네스의 두 손은 각각의 팔을 붙들었고, 그대로 잠겨버렸다. 그러면서 두 다리는 허리를 휘감았다. 엘은 다네스를 떼어놓을 수 없었다. 애초에 이런 그래플링 기술을 쓸 일도 없었다. 당할 일도 상정해두지 않았다.
대처할 수 없는 기술!
다네스는 여유롭게 웃으며 속삭였다.
“정말인가보네. 바로 살려달라 발버둥치지도 않고, 꿈틀대지도 않는 걸 보니…… 감각쪽이 잠겼나봐?”
“무슨 말이지?”
“우린 호흡을 하지 않아. 그런데 이렇게 목을 조르면 숨이 막힌 것처럼 기침이나 해대지. 그러지 않는단 건-”
그렇게 청각 센서에 속삭이던 다네스가 그대로 엘의 뒤통수에 자신의 머리를 들이받았다.
퉁-
“넌 아무래도 진짜 즐거움을 모른단 거지.”
그렇게 목을 조르던 다네스가 오른팔을 빼더니 그녀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한순간 시야가 꺼졌다. 시야만이 아니었다. 감지 센서에 잠깐 오류가 일어났기에 소리만이 들렸다.
탓-
왼쪽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엘은 주저하지 않고 오른팔의 검을 휘둘렀다.
츠각-
뭔가가 베이는 게 느껴졌다. 성공한 건가? 때맞춰 들어온 시야로 결과물을 확인했다.
“아.”
그러나 베인 건 다네스가 아니었다. 자신의 왼팔이었다. 당황하는 사이, 다네스의 손가락이 오른팔의 검을 노렸다. 평상시엔 팔의 형태를 하고 있기 때문에 검은 통짜로 만든 것이 아니었다.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있었고, 그 틈을 다네스가 노린 것이다.
탱강-
검의 일부가 뜯겨지자 엘은 즉각 검을 거둬들였다. 그러자 다네스의 한손이 그녀의 오른팔을 꽉 붙들었다. 이제 다시 검을 뽑기도 어려웠다.
“자, 이걸로 확실해졌네.”
다네스는 연료가 새기 시작하는 엘의 왼팔을 쳐다보았다. 스파크가 미세하게 일어나고 그 안의 금속들도 전부 보였다.
“자, 그럼-”
톡-
다네스의 손가락이 엘의 이마를 건드렸다. 그 순간.
“꺄아악!”
엘이 비명을 질렀다. 왼쪽 팔을 바들거리면서 온몸을 틀어대기 시작했다. 그건 이제까지 느껴보지 못한 감각의 오류였다. 온몸을 뒤흔드는 극악한 전기 신호! 다네스는 황홀한 표정을 지으면서 엘의 얼굴을 붙들었다.
“이거야. 이거! 어때? 처음 느껴보지 그거? 그게 인간들이 느끼는 고통이라는 거야.”
“아…… 으윽!”
다네스는 그대로 엘을 뒤로 밀쳤다. 그리곤 엘을 깔고 앉으며 히죽거렸다.
“말했잖아. 널 모방했다고. 감각이 살아있단 건 좋은 거야. 무감할 때와는 차원이 다르게 강해지거든. 그런데 원본인 네가 이런 기능이 없을리 없잖아?”
엘은 그녀의 말을 듣고 있을 수 없었다. 사고 회로가 꼬여버렸다. 그래서 오른팔이 자유로워졌어도 검을 꺼내서 반격할 수 없었다. 이 사실을, 다네스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어때? 어때?”
다네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뺨을 착 때렸다. 방금까지 했던 공격에 비하면 정말 형편없는 따귀였다.
착- 착-
쇠와 쇠가 부딪쳐서 차진 소리 대신 금속음만 울렸다. 매섭지 않은 따귀로 엘의 고개가 이리저리 꺾였다.
“크후후! 많이 아플 거야. 그치?”
다네스는 장난스레 따귀를 치다 말고 두 손으로 목을 졸랐다.
“커헉?!”
팔의 잘린 고통이 이 목조르기로 서서히 잊혀졌다. 숨통을 조이고 목뼈를 압박하는 듯한 아픔! 산소가 막혀버린 갑갑함이 엘의 메인 컴퓨터를 자극했다.
문제는 이것들이 그저 착각이란 것이다. 그녀는 호흡기도 없고 머리가 박살나도 기동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을 직시하기엔 고통이란 전기 신호가 너무 강렬했다.
엘이 눈을 떨면서 혀를 빼물었다. 한쪽 밖에 남지 않은 팔로, 다네스의 팔을 붙들며 발버둥을 쳤다. 다네스는 엘의 얼굴을, 간절한 손을, 바동거리는 두 다리를 번갈아보며 희열에 빠졌다.
“아아……”
당장이라도 실신할 듯한 표정으로 기뻐하던 다네스는 계속 목을 조르면서 고갤 숙였다. 삐죽 나온 혀를 앙 물더니, 입으로 입을 덮어버렸다. 엘은 자신의 불필요한 미각 센서(혀)가 뒤엉키는 걸 느꼈다. 하지만 얼마 안가 목을 조르는 아픔 때문에 버둥거릴 뿐이었다.
“푸하-”
다네스는 타액을 대신하는 윤활유를 한 줄기 흘리면서 웃었다. 그러다 뒤를 돌아보았다. 치마 밑에 가려진 하반신. 거기에서 연료가 새고 있었다.
“뭐야? 지금 지리고 있는 거야?”
다네스는 깔깔 웃더니 손을 뗐다. 그때 엘이 오른팔을 휘두르며 다네스를 떨쳐냈다. 다네스는 쉽게 뒤로 물러나더니 그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때? 지금 네 꼴을 봐봐.”
엘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두 눈에선 안구의 먼지를 제거하는 세척액이 주륵 흘러내렸고, 입에선 윤활유가 새어나왔다. 일그러진 표정까지 더 해지니, 소녀가 눈물과 침을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양새가 됐다.
하지만 이런 것을 인지할 시간이 없었다. 엘은 오른팔에서 검을 뽑아냈다.
츠캉-
“흣?! 흐아아악!”
검이 나오는 순간, 엘은 주저앉았다. 오른팔에서 참을 수 없는 아픔이 느껴져서였다. 차라리 왼팔이 날아간 게 다행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열과 진동으로 강화된 검날을, 무심코 붙들었을 테니 말이다.
다네스는 멍하니 쳐다보다 배를 감싸쥐고 웃었다.
“아프지 당연히! 지금 네 인공지능이 무엇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생각해? 생긴 거부터가 딱 인간이잖아. 보통 인간은 팔을 가르고 교정 장치를 조합해서 검을 만들지 않아. 왜? 엄청 아프거든!”
그 말 그대로였다. 팔이 잘린 아픔에 비견될 정도였다. 헛기침이 컥컥 나오고 온몸이 떨렸다. 그러나 엘은 아파하고만 있지 않았다.
탓-
스걱-
웃느라 그랬던 걸까. 엘이 발악에 가깝게 휘두른 검이 다네스의 가슴 장갑을 긁어버렸다. 생체 장갑까지 건드리진 않았는지, 베인 검은 장갑 밑으로 회색빛 금속이 보였다. 그러나 다네스는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까득-
이를 간 다네스가 엘의 얼굴을 걷어찼다. 손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사고 회로가 흔들리고 몸의 제어가 어려워졌다.
“이러면 안 되지.”
다네스는 그야말로 미쳐있었다. 장갑이 베어진 그 순간 정신 나간 여자처럼 웃더니, 저만치 날아간 엘에게 달려갔다.
그 이후론 무자비한 구타! 큰 손상이 가지 않게, 하지만 통각 센서가 더없이 저리도록 두들겨팼다. 엘은 한쪽 밖에 없는 팔로 몸을 가리려 했지만 그게 고작이었다. 다네스는 사지가 온전히 있었다. 어설프게 막힌 한팔을 피해 다른 부분을 패는 건 일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엘은 이런 통증에 익숙하지 않았다. 제대로 된 방어조차 할 수 없었다.
휘적대는 검. 그건 정말 애달픈 발버둥이었다. 다네스는 헛웃음을 켜며 그쪽 팔을 지긋이 눌렀다. 그리곤 뒤꿈치를 세워 명치 어림을 콱 밟아버렸다.
“읍 큭!”
체내의 모든 장치가 반응했다. 체내를 감돌던 연료가 역류하기 시작하더니 입으로 뿜어져버렸다. 입 쪽에 설치해둔 비상 연료 주입장치의 오류였다.
“케흑!”
엘이 윤활유가 섞인 투명한 액체를 뱉어내는 사이, 다네스는 불쌍하단 표정을 만들며 쪼그려 앉았다.
“어떻게. 정말 불쌍한 걸……”
하지만 말과 행동은 달랐다. 다네스는 엘의 머리칼(안테나)을 붙들어 당겼다. 머리 째 딸려 올라간 엘은 고통스러워 했다. 구타의 아픔이 남아있었고 역류의 이질감도 있었다. 거기다 머리칼이 뽑힐 것 같으니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아직이야.”
텅-
바닥에 팽개쳐진 엘을 보며 다네스는 히죽 미소 지었다.
“이제 시작인 걸.”
카르단의 실수는 두 가지였다. 첫 째, 엘에게 미리 감정선을 포함한 모든 것을 인간과 동등하게 만들고 잠가놓았다는 것. 처음부터 이걸 풀어놓았다면 아마 낯선 감각과 감정에 대응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카르단은 엘의 반항, 폭주를 염려에 두었다. 만일 자신의 기능성을 이해하고 부당함을 깨우친다면 연방군에겐 되려 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둘 째, 바로 제국군의 기술력을 무시했단 것이다. 그는 엘을 만들어낸 천재성에 너무 심취했다. 그래서 첩자의 가능성이 있었어도, 엘을 모방할 기술성이 없다 폄하했다. 실제로 제국군은 엘의 설계도를 가져가서도 제대로 쓰지 못했다. 그러나 운은 연방군에만 있지 않았다.
다크네스가 완성 돼고 카르단이 간과한 모든 것을 투입했다. 거기다 에루세르크에 대한 정보까지 더해졌다. 제국군은 시범 운용이 끝나고 실전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카르단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다네스는 멍청하지 않았다. 자기에게 부여된 모든 기술들을 이해하고, 제국군과 비교했다. 그리고 내린 결과는 자신의 압승.
제국에선 혹시 모를 오류에 대비하여 서른에 이르는 중장갑 병사 기체와 강화된 보안 시스템을 설치했다. 거기다 중화기를 두른 병사 일 백을 배치하고 엄중한 감시를 했다.
결과는 다네스의 예상대로 완승. 이때부터 다네스는 파괴의 기쁨을 알게 되었다.
“으아아악!”
피를 흩뿌리며 비명을 지르는 병사, 발악하며 총을 쏴갈기는 병사, 살려달라며 오줌을 지리는 병사, 닫힌 문을 긁어대며 주저앉는 병사, 욕설을 해대며 발버둥 치는 병사.
그들을 전부 죽였다. 그들의 목소리가, 파육음이 다네스를 흥분시켰다.
“좋네.”
그녀는 무자비한 학살을 끝낸 후 제국을 돕겠다고 말했다. 이 일로 회의가 일어났다.
살육병기를 받아들이느냐 마느냐. 사실 그들이 두려워 하는 건 방금처럼 예기치 못한 일을 벌이는 것이었다. 허나 다네스의 한 마디에 모두가 단번에 마음이 기울었다.
“너희가 우려하던 녀석, 내가 잡아줄게.”
그저 허세라고 생각했다. 제국도 멍청해서 당하진 않았다. 에루세르크의 기능은 병사 기체는 물론 여타 화기를 압도적으로 뛰어넘었다. 아무리 다네스가 위협적인 힘을 보여주었다지만 고작해야 손상이 끝이라 생각했다. 그건 10시간 뒤 무전을 보내라는 말에 대기 중인 두 병사도 같은 생각이었다.
“젠장. 그 미친 기계에게 휩쓸리는 거 아냐?”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정말 괜찮은 겁니까? 저희 이러다 연방군 붉은 귀신에게 잡히지 않겠습니까?”
붉은 귀신은 엘을 칭하는 말이었다. 붉은 장갑과 안광이 인상적이어서 붙여진 별명인데, 누가 처음 말했는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와 대적한 모두가 공감하고 있었다.
“하, 씨발…… 나도 그 눈 봐서 안다고. 존나 무서운데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야.”
다네스가 출발한다고 한 지 3시간이나 지났다. 매복병은 병사 기체 하나만 파괴 되고 달아났다고 전했다. 멀리서 관측을 하려 해도 엘 혹은 다네스가 무슨 짓을 했는지 그 일대만 일그러져보였다.
딱 두 번, 다네스가 설치하고 간 광학 병기가 광선을 쏜 것 말고는 그들에게 소식은 없었다.
“졌겠지?”
“그럴 거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위험하잖아.”
“이겼을 겁니다.”
“그러면 우린 계속 그 기계한테 휘둘려야 할텐데?”
후임 병사를 놀리던 병사가 갑작스런 신호에 놀랐다. 그건 다네스에게서 온 것이었다.
“콜린 상등병입니다.”
[ 상황 끝. ]
“예?”
[ ……죽여버리기 전에 내가 말한 거나 가져와라. ]
“아, 알겠습니다.”
다네스와의 통신이 끝나고, 병사는 툴툴거리며 본부에 신호를 보냈다.
“그런데 예비 부품이 왜 필요하죠? 연료 케이블은 또 왜 필요하고……”
“그야 싸우다 당했겠지. 그런 괴물을 쉽게 잡겠어? 뭐하고 있어. 셔틀 시동 켜놔. 곧 보내준대.”
“네, 그럼……”
우우웅-
거대한 왼팔과 긴 연료 케이블을 매달고 있는 셔틀. 부유하고 있는 이 기체는 아무것도 없을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기이한 진동을 느꼈다. 그리고 여태껏 가려졌던 다네스의 모습이 보였다.
‘굴절 장치? 흥, 쳐발리는 게 들킬까봐 그런-’
조수석에 앉아있던 병사는 자신이 본 풍경에 입을 떡 벌렸다.
넝마가 된 엘과 그녀의 팔을 붙들고 있는 다네스. 둘의 모습에 병사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세상 씨발……”
그때 다네스가 그들이 탄 셔틀을 보더니 엘을 툭 놓았다. 그리곤 날아오는 셔틀의 날개를 콱 붙잡았다.
“바로 오라 했을 텐데?”
성난 그녀의 말에 병사는 다급하게 음성 송신기를 켰다.
“죄송합니다. 말하신 부품이 워낙 운반하기 까다로워서 늦었습니다. 이동 시키는 시간도 있어서……”
다네스는 그걸 전부 꿰고 있었다. 그들의 도착 시간은 오차 범위 내였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도 그저 심술이 났을 뿐이었다. 엘이 막대한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임시 휴면 상태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래?”
하지만 다네스는 그들을 괴롭히는데 시간을 쓰지 않았다. 지금 눈앞에 더 재밌는 게 있는데, 시간을 낭비할 필욘 없었다. 그래서 원하는 걸 받고 그들을 보내주었다.
“아직 약속했던 시간에서 반나절 남았으니 그때 보자고.”
“네, 네……”
병사는 셔틀이 돌아서자마자 본부로 연락을 취했다.
“당소 에코 다섯. 붉은 귀신 무력화 확인.”
키잉-
꺼졌던 메인 컴퓨터가 부팅을 시작했다. 시야가 돌아온 엘은 불쾌함에 몸을 일으켰다. 해제된 감각이 풀리고 겪는 첫 기절은 몹시 찝찝했다. 휴식 상태와 비슷했지만 강제성이 있단 점이 달랐다.
“하- 아?”
무심코 땅을 디디던 엘은 자신의 왼팔이 무사하단 걸 알았다. 조금의 이질감도 없었는데, 다만 무기가 없었다는 점이 거슬렸다. 추가 보호 장갑 역시 없었다. 그러나 팔이 있단 사실에 안도하면서, 흙을 만지는 촉감이 살아있단 것에 인지 오류가 아니란 걸 확신했다.
그리고 자신이 다네스와 싸우고 있었단 걸 상기했다. 팔은 멀쩡했지만 몸은 여전히 만신창이였다. 다네스에게 무자비하게 두들겨 맞은 흔적이었다. 엘이 주변을 살피면서 통신망을 켰다. 그러나 지지직대는 노이즈만 들리고, 보이는 건 다네스 하나밖에 없었다.
“큿……!”
일어나려던 엘은 그 자리에 다시 주저앉았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엘은 뒤늦게 하반신에서 뭔가 샌 걸 느꼈다. 치마 어림을 들춰보니 연료 주입구 어림에서 샌 흔적이 있었다. 연료가 거의 바닥이 난 걸까. 엘은 끊어졌던 기억을 차분히 맞춰보았다.
그 사이 멀리 서있던 다네스가 걸어왔다.
“이제 깨어났네. 몇 시간만 늦었어도 강제로 깨우려 했어.”
엘은 대답 대신 노려보기만 했다. 시스템이 다운될 때까지 두들겨패기만 했다. 심지어 끝장내지도 않고 자신의 팔을 고쳐주기까지 했다. 뭔가 원하는 게 있을 것이다.
“그렇게 노려보지마. 혹시 네 연료를 전부 뺏어가서 그래?”
“연료를……”
다네스는 히죽 웃으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러자 손바닥에서 빛이 새어나오더니 허공에 무슨 영상을 보여주었다. 처음엔 무엇인지 몰랐지만 몇 초 후, 엘은 자신의 하반신을 보고 있는 다네스의 시선이란 걸 알았다. 그녀는 엘의 치마를 들추더니 다리를 활짝 벌리고 있었다. 그리곤 주입구 어림을 쳐다보다 곧 아랫배로 시선이 굳어졌다. 시야가 위아래로 까딱거리는 게 보였다. 그것 외엔 아랫배 위쪽의 엘 자신의 모습만이 보였다.
그때 다네스가 손가락을 튕겼다. 이번엔 시야가 바뀌었다. 그리곤 조금 높은 위치에서 촬영한 듯한 영상이 보였다. 덕분에 왜 다네스의 시야가 그랬는지 알 수 있었다.
다네스는 편히 앉아서 엘의 다리 사이에 입을 갖다 대고 있었다. 주입구에 입을 맞추고 쪽쪽 빨다가 혀를 낼름거리는 모습이 확대되어 보이기도 했다. 무려 10분이 넘게 그짓을 하던 다네스는 입가를 핥으며 똑바로 쳐다보았다.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던 엘은 흠칫 떨며 자기 하반신을 내려다보았다.
“기동에 필요한 최소한만 남기고 전부 빨아냈지. 어때? 힘이 잘 안들어가지?”
“대체 뭘 원해서……”
“4시간 남았어.”
다네스는 엉뚱한 답을 하더니 엘의 팔뚝을 잡아챘다.
“내가 그토록 원하던 즐거운 시간이 4시간 밖에 안남았단 말이야.”
엘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치마를 들추었다. 그리고 나타난 건…… 연료 케이블이었다. 다만 그 형태가 남근과 흡사했으니, 어찌 보면 음경을 단 여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엘에겐 그런 지식이 없었으니, 윤활유 냄새가 가득한 케이블을 쳐다볼 뿐이었다.
“무슨……”
“정말 좋은 걸 알았거든.”
다네스는 자기 입술을 핥으면서 케이블 끝을 디밀었다. 그 끝에선 연료가 희미하게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혹시나 싶어 너도 가능할까 했는데…… 정말 잘 됐어.”
“그게 무슨 소-”
다네스는 말을 하던 엘의 머리를 붙들곤, 입에다 케이블을 욱여넣었다. 억지로 턱을 벌리고 들어간 케이블은 그대로 목구멍을 눌렀다. 엘이 컥컥 기침을 하는 사이, 다네스는 혀를 빼물으며 허리를 흔들었다.
탕- 탕-
기름이 가득 묻은 케이블이 엘의 입안을 왕복했다. 이 미끈하고 두터운 선은 엘의 입 크기보다 좀 더 굵었다. 그래서 파고들 때마다 케이블 겉면의 기름이 입 주변을 흥건히 적셨다. 그것이 여러 번 반복되니 바닥에 뚝뚝 떨어질 정도로 푹 젖어버렸다.
쾌락 스위치. 남근을 대체한 케이블에서 오는 전기 신호. 자신과 같은 엘을 범하는 상황! 모든 것이 상상 이상이었다. 그것은 다네스의 폭력성을 좀 더 이끌어냈다. 그래서 머리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고, 아까보다 더 강하게 엘의 입과 다네스의 아랫배가 부딪쳤다.
탕- 탕- 탕-
케이블이 깊게 들어가는 건 당연했다. 그래서인지 비벼지는 느낌이 더 오래 남았고, 덕분에 다네스는 제법 일찍 만족할 수 있었다.
“하- 흐읍-”
저항할 힘없이 붙들던 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목 깊이 박힌 케이블에서 뭔가 나오는 게 느껴졌다. 그건 분명 연료였다! 비상시에 주입하라고 만든 부분이었기에, 이곳에 흐른 연료도 충분히 에너지로 쓸 수 있었다. 다만 불쾌한 목넘김과 굴욕적인 자세 때문에 거부감이 들었다.
“빨리? 제대로 받아 마셔야지?”
그녀의 말대로 지금 연료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됐다. 미세하게 흐르는 연료를 꿀꺽거리며 마시니, 어느 정도 힘이 돌았다. 그때 팟, 하고 연료가 터져나왔다. 그건 실상 아무 영향도 안주었지만 잠깐 비상주입구를 덮어버렸다.
“어때?”
“켁…… 헤윽……”
엘은 대답 대신 케이블을 뱉어냈다. 연료가 뚝뚝 흐르는 케이블을 살짝 휘어져 솟아있었다. 다네스는 만족하지 못했지만 마냥 웃고 있었다.
“후후- 이거 생각보다 좋은데?”
다네스는 엘을 엎드리게 하곤 머리를 땅에 짓눌렀다.
“지금 이게 뭔지 알아? 우린 지금 섹스를 하는 거야.”
“뭘…… 한다고……?”
케이블은 무릎을 디디고 있는 하반신을 겨누었다. 그리곤 닫혀있는 주입구를 열어서 힘껏 밀어 넣었다. 케이블이 파고 든 그 순간, 엘은 하반신에서 솟구치는 전기 신호에 비명을 질렀다. 이번엔 팔이 잘렸을 때 느낀 아픔같은 게 아니었다.
기쁨. 굳이 표현하자면 그런 감정밖에 없었다. 아직 쾌감을 모르는 엘에겐 고통 다음으로 낯선 느낌이었다. 다네스는 엘이 내지르는 소리에 기뻐했다.
“꺄아앗!”
“하하하!”
쾌락에 취한 다네스는 엘을 짓뭉갤 기세로 허리를 흔들었다. 둘을 연결해주는 케이블은 부드럽게 움직였다. 엘이 채 마시지 못한 연료가 코팅되면서 윤활유 역할을 한 듯 했다. 그래서인지 움직임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다네스는 허리를 엘의 허리를 붙든 채 기쁨에 소리쳤다. 그건 엘도 비슷했다. 대체 어떻게 한 건진 모르겠지만 전기 신호는 엘에게 좋은 감정을 일깨워주었다. 그건 몹시 중독적이었다. 그리고 격앙되게 만들었다.
힘없이 흔들거리는 엘의 머리가 옆으로 돌려졌다. 다네스의 우악스런 손이 머리를 붙들어 돌렸기 때문이다. 엘이 멍하니 돌아본 순간 다네스의 입이 겹쳐졌다. 둘의 혀가 뒤엉키는 동안에도 다네스의 허리가 바쁘게 흔들렸다.
비교적 물렁하다지만, 금속성인 둘의 피부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그 청명한 소리를 덧붙여주는 건 엘의 신음이었다.
“학…… 흑……!”
그리고 이 소리는 다네스를 흥분시켰다. 인간을 찢어죽이고 부술 때와는 다른 쾌감!
“좋아, 좋아!”
케이블에서의 전기 신호가 극에 달했다. 그리고 그 순간 다네스의 주입구로부터 연료가 터져나왔다. 아까보다 많은 양의 연료가 엘의 주입구에 꽂힌 케이블을 통해서 터져나왔다. 순식간에 3분의 1이나 채운 연료 덕에 엘은 힘을 낼 수 있었다.
“하아…… 하아…… 흐읏!”
엘은 앞으로 힘껏 기어갔다. 그러더니 주먹을 말아쥐며 휘둘렀다. 정말 사소한 반항이었다. 무기조차 없는 엘에게 이런 주먹질은 다네스에겐 하찮은 것이었다. 그러나 신경을 거슬리기엔 충분했다.
쩍-
엘의 주먹을 막아낸 다네스는 뺨을 후려갈겼다. 그러더니 검지와 엄지를 겹쳐보였다.
“에너지가 충분히 돌지도 않았는데 덤벼? 푸흐흐- 차라리 에너지가 완충된 뒷면 달아나기라도 했었을 텐데 말이야.”
겹쳐진 두 손가락의 관절이 나뉘어졌다. 그대로 손가락이 길어지나 싶더니 곧 검은 채찍과도 같이 변했다.
찌직-
푸른 빛이 감도는 채찍. 그것은 곧 엘의 몸에 작렬했다.
쩡!
“건방지게 어디서 기어올라? 응? 그것도 어정쩡하게 말이야!”
다네스가 소리를 높이며 엘의 몸을 채찍질 했다. 유연하게 휘어지는 금속 로프는 경쾌한 소릴 내며 작렬했다. 아무리 팔다리로 허우적대며 막아도 피부에 적중한 채찍의 아픔은 남달랐다. 거기다 채찍에 감도는 전기 신호는 엘의 감각을 증폭시켜주고 있었다.
엘의 몸 곳곳에 매서운 채찍에 긁혀 검은 그을음이 남았다. 그러던 중 다네스는 문득 채찍질을 멈췄다.
“흑…… 흐……”
웅크리며 오들오들 떨고 있는 엘의 모습. 다네스는 두 눈을 크게 뜨며 손가락을 튕겼다. 주변을 맴도는 드론들이 다네스의 신호에 엘의 모습을 영상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아아…… 최고야……!”
황홀경! 엘은 다네스의 가학심을 최고조로 이끌었다. 다네스는 주체할 수 없는 기쁨에 온몸을 떨며 채찍을 거두었다.
“개발해줄게.”
“아학!”
다네스의 케이블은 몇 번이고 엘을 찔러댔다. 위, 아래 할 것 없이 다네스가 상정한 시간 동안 벌어진 교미. 그 덕에 엘의 전신은 연료와 윤활유로 범벅이 되었다. 그 사이 다네스는 몇 번이고 엘의 몸에 전기 충격을 가했다.
반복적인 자극. 그것은 엘의 메모리에 충분히 각인되었다.
“학…… 흑……”
널부러진 엘의 모습을 촬영한 다네스는 손을 털어냈다.
“만족스러웠어.”
다네스가 손짓을 했다. 엘은 뒤늦게 노이즈만 끼던 안테나에서 목소리가 들리는 걸 느꼈다.
“엘! 에루세르크! 대답해!!”
엘은 입을 뻐끔거렸다. 몇 번이고 찔러지는 케이블의 감촉, 그걸로 이루어지는 쾌감. 그것들이 엘의 메모리를 채운 모든 기억을 짓눌렀다.
“아……”
통신에 대한 방법도 잊어버렸다. 엘은 그저 입만 뻐끔거렸다.
“살…… 려……”
그리고 인공지능에 새겨진 본능. 그것이 이끄는 말을 하며 시스템이 끊어졌다.
에루세르크의 대패!
그 증거로 제국군은 끝없이 밀어닥치며 연방군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젠장 그 망할 기계는 뭘 하고 있는 건데!”
연방군 총사령관 갈러의 분노는 카르단에게까지 미쳤다.
“박사! 다른 기체는 준비되지 않은 건가!”
“아, 아무래도……”
“젠장! 신호는?”
“방해 전파 때문에 잡히지 않고 있습니다!”
“크으-”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바로 엘의 메모리에 들은 연방군에 대한 정보였다. 당장 본부의 위치만 알려져도 그들은 위험했다. 에루세르크라는 비정상적인 병기 덕분에 제국군을 상대로 줄타기를 할 수 있었다. 그런 지금, 본진에 제국군의 병력이 들이닥친다면 끝이다!
그러나 그들은 평소보다 활발히 움직일 뿐, 연방군의 핵을 노리지 않았다. 그 이유를 알아내려는 수뇌부들의 회의는 계속 허탕을 쳤다.
“다크네스는?”
“그것이…… 여전히 에루세르크를 내놓지 않고 있-”
쾅!
보고를 받던 제국군 총사령관 헬림은 책상을 내리쳤다.
“대체 뭘하고 있는 거지!”
“저희도 아직……”
헬림은 보고를 하고 있는 지휘관을 째려보았다.
“우리가 만든 병기다! 그런데 주도권을 잡기는커녕 휘둘리고만 있어!?”
그의 외침에 지휘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분명 곳곳에 손상이 갔지만 엘을 잡아온 건 제국의 역사에 기록될만한 일이었다. 이제 세뇌 프로그램만 주입한다면 그들은 막강한 전력을 얻는다! 거기다 점 조직으로 흩어진 연방군의 본부까지 알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이건 내꺼야.”
다네스는 조금의 양보도 없이 이렇게 말했다. 그리곤 엘을 건드리려는 병사 기체 두 기를, 조종사와 함께 동강내버렸다. 그 뒤 다네스는 자신의 개인 공간으로 걸어 들어가더니 엘을 내놓지 않았다. 해킹을 하려 해도 그들의 보안 프로그램은 무선망으로 건드리기엔 너무 강했고, 다네스를 뚫고 선을 연결하는 건 불가능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제국군이 할 수 있는 건 지름길을 두고 멀리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후우…… 자네가 무슨 죄가 있겠나.”
헬림은 갑갑함에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다크네스가 다른 요구는 하지 않던가?”
“별 다른 건 없습니다만…… 조금 신경쓰이는 게……”
“뭔가?”
“진동 기구를 달라고 했습니다.”
파이프에 담배를 넣던 헬림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후우후, 파장을 흘려버리는 소재라서 아무리 벽에다 통신을 해도 안될 거야.”
다네스는 그렇게 말하며 돌아보았다.
“흣…… 그윽……”
그러나 엘은 대답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입을 묶고 있는 단단한 굵은 철사 때문이었다. 어떻게 말을 할 순 있어도 제대로 된 언어 구사를 못했으니, 엘은 옹알이를 할 바엔 말을 하지 않는 걸 택했다.
무엇보다 그녀는 말을 하기 곤란한 상황이었다.
지이이잉-
약한 진동. 그건 엘에게서 들렸다. 그 원인은 바로 주입구와 가슴에 부착된 로터 때문이었다. 주입구에 끼워진, 바이브도 한 몫 하기 위해 꿈틀거리고 있었다.
“어때 그거? 성인 기구라는 거야.”
다네스는 자기가 직접 만든 바이브에 정신을 못차리는 엘을 보며 전율을 느꼈다.
“여기도 충분히 제 기능을 하나 보네.”
가슴 어림에 유두처럼 솟아있는 건 비상 배출구였다. 가슴에 저장해둔 연료를 한 번에 빼내기 위한 깜찍한 돌출부는 피부의 생체 금속보다 더 유연한 금속이었다. 그래서인지 로터에 감싸진 나머지 부분이 다네스의 손에 집힌 채 이리저리 기울여져도 끊어지지 않고 부드럽게 구부러졌다. 물론 이곳에도 센서가 부착되어 있어서 감각 신호가 반응하고 있었다.
“흐그윽!”
“힘이 슬슬 빠질 텐데. 뭐, 좋아. 버티는 것도 나름 재밌으니까.”
다네스는 그렇게 말하며 엎드려서 덜덜 떨고 있는 엘을 구경했다. 1시간 째 방치된 엘은 바닥에 머리를 비비고 있었다. 몇 시간이나 범해진 엘은 자신의 감각에 완벽하게 적응했다. 아니, 적응하다 못해 중독되어버렸다. 메모리가 불타버릴 정도로 아찔한 그 쾌락이란!
하지만 그걸 위해선 자존심을 버려야했다. 유일하게 남은 저항 수단을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3분이 흘렀다. 잠깐 단단해졌던 결심이 서서히 녹아내렸다.
“아아……! 흐으으!”
“왜? 왜 그래?”
다네스가 그렇게 말하면서 엘의 하반신에 슥 가더니 바이브를 콱 잡았다. 그리곤 거칠게 쑤셔대면서 엉덩이를 짝 때렸다.
“하아아!”
결국 엘은 철사 너머로 혀를 뻗으며 교성을 뱉었다. 다네스는 충분히 만족스러워하며 그녀의 주입구를 마음껏 쑤셔주었다. 맨들거리는 주입구 주변에 설치된 로터들이, 바이브가 흘린 윤활유를 진동으로 털어냈다. 곧이어 주입구에선 연료가 역류하며 뿜어졌다.
다네스는 손에 흥건히 묻은 연료를 슬쩍 핥았다. 이것 역시 엘의 몸을 조금 손 본 결과였다. 여성의 절정과 비슷하게 만들어진 연료 역류는 참 마음에 들었다. 다네스는 엘의 입을 자유롭게 해주더니, 손가락에 흠뻑 묻은 연료를 입에 집어넣었다.
“자, 쏟은 건 해결해야지.”
엘은 그것마저 없으면 기동이 멈출 것 같아서 다급하게 핥아댔다. 그 모습에 다네스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이곳에 오면서 개조한 자신의 연장 주입구를 꺼내들었다. 이제 남성의 발기처럼 안쪽에 체내에 내장되어 있다가 바로 뽑아낼 수 있었다.
그렇게 뽑혀진 케이블은 다시 한 번 엘의 음부에 꽂혔다.
보름이 지났다. 연방군은 특유의 꼬리 끊기 방식으로 계속해서 달아났다. 덕분에 7할의 전력을 잃었음에도 꾸준히 제국군에 대항했다. 그들의 발악에 가까운 반항에 제국은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랐다. 사실 압도하지 못하는 이유도 다네스에게 있었다. 엘과의 섹스에 정신이 팔린 그녀는 전쟁에 소극적이었다. 어쩔 땐 아예 참전하지 않기도 했다. 그래서 엘 등장 이전처럼 답보 상태가 된 것이다.
참다못한 헬림은 직접 나서서 다네스에게 따졌다. 고래고래 소리치는 헬림을 짓밟으려던 다네스는 뭔가 생각났는지 손가락을 튕겼다. 그리곤 최후의 전투를 준비하라며, 기대 이상의 역할을 해주겠다 자부했다.
쩡-
다네스의 손이 엘의 둔부를 가격했다. 경쾌한 소리가 울리면서, 이어서 엘의 교성이 터져나왔다. 살살 엉덩이를 만지던 손이, 자연스레 주입구를 향했다. 연료가 줄줄 흐르는 그 구멍을 손가락 2개가 파고 들더니, 질척한 소릴 내며 연료를 튀겨댔다.
“하앙! 앙!”
“크흐후- 좋니? 좋아?”
“조, 좋아…… 으응……! 좋아……”
그 순간 다네스의 눈이 사나워졌다. 손가락을 냅다 뽑아버리곤 그녀를 걷어찼다. 내동댕이 쳐진 엘을 보던 다네스는 그녀의 둔부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하반신이 양옆으로 흔들릴 만큼 모진 손속에 엘은 앙앙거리며 달달 떨었다. 엉덩이를 높이 세우고 늘어진 엘을 보며 다네스는 입을 가리며 웃었다.
“존댓말은?”
“죄, 죄송합니다아……”
엘의 시스템은 다네스에게 완전히 종속되었다. 이제 그녀에게 반항이란 있을 수 없게 됐다. 다네스는 조금 아쉬워 하다가도 그녀의 교태를 볼 때마다 흥분에 날뛰었다. 신나게 엉덩이를 때린 다네스는 발로 툭 밀어서 바로 앉혔다. 그리곤 주입구를 발의 앞꿈치로 꾹꾹 밟으며 비벼주었다.
“건방지게 말을 낮춰?”
“아앗!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시스템 오류 때문에엣……!”
그렇게 발가락을 놀리던 다네스는 연료로 흥건해진 발을 들었다. 그러자 엘은 기다렸단 듯이 그 끝에 입을 쪽 맞추더니 발의 앞부분을 입에 구겨넣었다. 쯥쯥대면서 빨아대는 엘의 모습은 아주 볼만했다. 양옆으로 늘어진 입, 빵빵해진 볼과 세척액으로 촉촉이 젖은 두 눈.
다네스는 잔뜩 열이 올랐다. 이대로 과부하 될 것만 같아서 케이블을 쭉 뽑아냈다.
“아아……”
“알지?”
엘은 무릎 걸음으로 다가와 다네스의 케이블을 핥았다. 그녀에게 따로 연료를 주지 않았다. 그저 입이나 주입구에 케이블을 박아 넣고 주유를 해주었다. 그런 상황에서 쾌락 시 연료 역류가 일어나니 그녀는 탈출할 힘을 키우기는커녕 하루하루 연명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쾌락은 지독한 마약이 되었다.
엘은 고갯짓과 혀만을 사용하며 케이블을 핥아댔다. 그리곤 연료가 희미하게 맺힌 주유구 부근을 혀 끝으로 긁어내면서, 케이블 몸통 부분을 손으로 잡고 흔들어댔다. 생존과 직결되어서일까, 엘의 학습 능력은 크게 올랐다. 그래서 고작 며칠만에 지금처럼 구강 성교 기술이 늘어났다.
“자, 조금만 더 힘을 내봐.”
다네스가 허리를 움찔거리며 말했다. 그러자 엘은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가슴 사이에 케이블을 끼웠다. 그리곤 두 팔로 양쪽 가슴을 눌러 모으곤 위아래로 몸을 비벼댔다. 케이블 끝을 머금고 빨아대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네스는 큭큭 웃으면서 그녀의 가슴 돌출부를 꼬집어당겼다.
“흥으우……”
“내일 너도 마지막 전투에 참가할 거야.”
“네에에……”
“그러니 내일 충분히 움직이기 위해 연료를 넣어야겠지?”
이 말은 자기가 힘에 부칠 때까지 섹스를 하겠단 소리였다.
“네에에……!”
물론 거의 세뇌되다시피한 엘에겐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그녀를 유혹하듯 엉덩이를 내밀며 흔들어보였다.
그렇게 다네스의 케이블과 엘의 주입구가 결합되었다.
“결전인가……”
갈러는 끝임을 짐작했다. 그들의 포위망은 정확히 본진을 노리고 있었다. 도망칠 구멍도 없었으니, 그들은 죽음을 각오한 마지막 전투를 기다렸다.
“에루……”
한 소녀가 엘을 본따 만든 인형을 끌어안았다. 제국에 대척한 연방군의 영웅. 비단 소녀만이 그녀를 기다리는 게 아니었다. 당장 제국군과의 싸움을 앞둔 병사들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희망이 들렸다.
“에, 에루세르크입니다!”
통신병의 외침에 지휘관들은 물론, 갈러도 경악하며 소리쳤다.
“그, 그래. 어디 있지?!”
“그것이……”
탓-
갈러가 병사를 밀치더니 컴퓨터를 조작했다. 그는 제국군을 비춰주는 카메라를 하나하나 살피다 인간 형상이 보이는 곳을 확대했다.
그리고 경악했다.
탓-
분명 엘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아는 모습이 아니었다. 금발에 검은 장갑이라니? 세뇌가 되버린 건가. 그렇게 탄식하고 있을 때 갈러가 돌아섰다.
“끝이로군.”
그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네…… 세뇌가 되다니……”
“아냐. 그 밑을 봐라.”
“네?”
모두의 눈이 아래를 향했다. 엘의 밑에 누군가 있었다. 그건 엘이라고 생각했던 다네스를 태우고 있는 무언가였다. 그리고 그건……
“에루세르크……?”
엘은 두 눈이 가려진 채 네 발로 기고 있었다. 그것도 목에 개목걸이를 차고서! 그 줄을 잡고 있는 다네스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엘의 등에 타고 있었다.
“하윽……!”
물론 이건 전방의 모습이었다. 후방에선 주입구와 배출구에 바이브를 꽂고 있었다. 그야말로 창녀나 다름없는 모습!
갈러는 제국에게 투항을 선언했다. 연방군의 꿈이자 영웅의 무너진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그 희망도 얼마 안가 무너졌다.
“자, 봐. 이게 너희의 영웅이었던 자의 모습이야.”
다네스는 쪼그려 앉아 허벅지를 활짝 벌린 엘의 모습을 연방군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바이브와 함께 연료를 뿜으며 절정을 맞이한 엘은 발라당 누워 개처럼 할딱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