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 동안 남녀의 고충
Added 2021-06-29 07:49:03 +0000 UTC두 사람의 첫 만남은 무인 편의점에서 시작되었다.
‘아.’
‘어.’
우연치 않게 두 사람 다 입도 심심하고 목도 칼칼해서 맥주를 사러 나오는 길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 다 한밤중에 돌아다녀도 될 정도로 성인이었으며, 두 사람 다 사람 눈치를 볼 정도로 소심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 다 나이에 비해 한참 어려 보였다. 그랬기에 바로 옆에서 냉장고를 열려고 손을 뻗은 상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왜 이렇게 안 가지?’
‘뭐지, 뭘 사려고 온 거야?’
소희, 대훈 두 사람은 계속 서로를 힐끔거렸다. 기껏 해야 초등학생을 간신히 넘은 듯한 아이 앞에서 함부로 술을 사기엔 조금 그랬다.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그냥 신경 끄겠지만 혹시라도 이 녀석이 호기심 삼아 사갈 수도 있었다. 그게 아니라도 구태여 애 앞에서 술을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저 빨리 가라, 어서 가라, 그 생각으로 힐끔거렸다. 하지만 눈앞의 아이는 도저히 떠날 생각이 없었다. 계속 곁눈질을 해대며 속을 긁어놓았다.
‘이 꼬맹이가 진짜…… 어르신이 술 사는 거 처음 보나? 빨리 안 가?’
‘아이 진짜, 누가 심부름 시킨 건가? 혹시 물건 사는 게 처음이라 도와줘야 하나?’
그러다 두 사람은 동시에 해결 방안을 떠올렸다.
잠시 자리를 비우면 이 꼬마도 가버리지 않을까? 호기심이든, 심부름이든 당사자가 없으면 제 할 일을 할 거라 생각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둘 다 같은 타이밍에 발을 뗐고, 쾌재를 불렀다.
‘역시, 꼬맹이 생각이 거기서 거기지.’
‘아휴, 좀 할 거면 빨리 하던가. 애는 집 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자라.’
소희는 콧방귀를 뀌며 같이 먹을 안주를 찾았다. 간만에 기분이나 내볼 생각으로 치즈 육포를 골랐다. 대훈 역시 술안주로 값싼 과자 한 봉지를 샀다. 그리고…… 다시 냉장고 앞에 온 순간 서로를 마주하게 되었다.
‘와 이거 진짜 징하네.’
‘아니 설마 술 심부름도 시킨 거야? 저 육포는 뭔데?’
둘은 짧은 시간에 서로를 훑어보고 다시 냉장고 앞에 멈춰섰다.
다시 시작된 대치. 밤늦게 이루어진 남녀의 기 싸움은 10분 째 계속 되었다. 이제는 오기로라도 술을 사가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정 안 된다면 눈앞의 애에게 한 소리해도 됐지만……
‘다른 사람이랑 말하기 어렵다고……!’
‘아무리 애라고 해도 얘도 사람이잖아……!’
극렬한 소심함이 부른 참사…… 마음 같아서는 다른 편의점을 가고 싶었지만 무인 편의점은 여기가 유일무이했다. 주민등록증을 주어도 믿지 않는 알바생들이 태반이고 그런 말다툼조차 피하고 싶었던지라 다른 곳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여기뿐이다!
이 장소는 그들의 유일한 보금자리이자 활로였다. 아무런 제약 없이, 누구와의 대화 없이 술을 사기 위해서는 이 곳 외에는 다른 곳은 상상할 수 없었다.
승부를 봐야 한다!
여기서 물러날 수 없다!
두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고 고개를 돌렸다. 당연하게도 시선이 마주쳤고…… 잠시 둘은 말이 없었다.
그리고 둘은 집으로 돌아갔다. 맥주를 사러 왔다가 치즈육포와 과자만 씹으며……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
‘아 또 만났어.’
‘이 정도면 운명 아니야?’
혹시나 싶어 요 며칠은 무인 편의점에 가지 않았다. 거의 반강제적으로 금주를 하다 보니 스트레스가 쌓였지만 다시 그 애와 기싸움을 하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입가심용으로 생각한 데다 다른 사람과의 신경전을 벌이는 스트레스가 더 심했다.
그렇다고 완전히 포기할 수 없었다. 배달을 할 수도 있었지만 훨씬 비싼 데다 직접 냉장고에서 꺼낸 시원한 걸 마시고 싶었다.
그래서 시간을 확인하고 나간 것인데……
‘요즘 애들 스마트폰 중독이라더니 이렇게 밤늦게까지 안 자는 거야?’
‘지금 이 시간까지 심부름 시키는 거 아동 학대라고. 거 부모님 얼굴 좀 보고 싶네.’
설마 또 마주칠 줄 몰랐다. 어떻게 이리 정확한 타이밍에 만날까.
‘아씨, 들어오고 곧바로 골라가야 했나? 하지만 신상 맥주가 어딨는지 안 보였단 말이야.’
‘곧장 들어온 건데 얘는 또 왜 여깄는 거야? 빨리 옆 냉장고에 있는 뽀로로 음료나 집어가라고……!’
소희는 곁눈질로 대훈을 흘겨보았다. 아무리 봐도 평범해 보이는 소년이었다. 얼굴은 확실히 귀여운 상이었고 1년만 지나면 누나들 좀 울리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무리 좀 생기고 귀여워 보인다고 해서 이런 식으로 방해를 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출출한 새벽, 야참에 캔맥주는 그녀의 소박하지만 확실한 행복이었다. 그것이 아무리 애라고 해도 방해할 수 없는 숭고한 의식이었다.
‘아무리 꼬맹이라 해도 봐줄 생각 없어!!’
그러나 이런 마음은 대훈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귀여운 소녀였다. 나이 좀 있는 어르신이나 로리콘에게 확실히 먹혀 들어갈 얼굴이었다. 특히 박스티가 엄청나게 잘 어울릴 듯 했다. 분명 몇 년 뒤에는 여러 남자를 홀려서 관계가 복잡하게 꼬일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대훈이 그 귀여움에 넘어갈 사람이 아니었다.
맥주 한 모금에 담배 한 모금. 업무 스트레스를 풀어낼 극락이었다.
‘네가 어른의 고충을 알기나 해? 어?!’
두 사람은 머릿속에서 상대를 몇 번이고 혼내주고 내쫓았다. 하지만 그래봐야 상상 속일 뿐이었다.
말없이 냉장고 앞에 서있길 14분 째…… 두 사람은 결국 이 날도 빈 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몇 번이고 이런 충돌이 계속 되었다.
하루는 소희가 먼저 냉장고 문을 잡으려다 대훈이 들어섰다. 대훈은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느긋하게 안주를 고르다 소희가 온 걸 발견하기도 했다. 어느 때는 동시에 무인 편의점 앞에서 만나서 자연스럽게 지나쳐갔다.
이쯤 되니 상대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 따라다니는 거야? 어?’
‘와 씨, 미치겠네.’
그렇다고 상대에 대해 캐물을 수도 없었다. 정말 우연의 일치로 만나는 거라면? 그걸 의식해서 말을 꺼낸 자신이 바보가 되고 엄청나게 부끄러워진다. 어쩌면 두 번 다시 이 편의점을 이용하지 못할 지도 몰랐다. 그런 창피한 짓거리를 하고 어떻게 여기 발을 붙인단 말인가!
그랬기에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말을 던져보지 못했다. 그리고 택한 건…… 최악의 수였다.
다른 편의점 가기!
*
소희는 신장이 지극히 작았다. 보통 작다고 하는 여자들보다 작았으니 어딜 가도 꼬마라 불리기 일쑤였다. 심지어 타고난 탱탱한 피부 때문에 그 오해를 피할 수 없었다.
당연히 소희 나름대로 노력했다. 동성들은 시간이 멈춘 듯한 피부와 머릿결을 부러워했고, 이성들은 그녀 귀여운 얼굴과 앙증맞음을 좋아했다. 그들의 공통점이라 한다면 성인 여자가 아닌 나이 어린 여동생 정도로 취급했단 점이었다. 심지어 소희가 대학에 들어서 만난 첫 사랑도 동생 취급을 해버렸다. 그녀가 좋아했단 걸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과 연애하다 깨지는 일까지 있었다.
그러나 소희는 좌절하지 않았다. 그저 어려보이는 외견을 최대한 보강하기 위해 애썼다. 보형물이 든 브래지어는 물론, 굽이 높은 힐도 신어 보았고 어른스럽게 화장도 해보았다. 하지만 그 무엇을 해도 유아 체형이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소희는 나름대로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꾸몄다.
그 결과…… 지나가는 사람들 중 열에 아홉은 돌아볼 정도로 귀여운 소녀가 되었다. 화장은 최대한 옅게, 옷은 오버핏 대신 슬림핏을, 귀여움 대신 청아함을 살리며 꾸몄다. 그래서 이제 섣불리 그녀를 어린 애로 넘기는 사람은 없었다. 여전히 어리게 보았지만 조금은 위화감을 갖게 되었다.
그 대신…… 로리콘이라 해야 하나, 좀 특이 취향의 사람이 많이 붙게 되었다. 당연히 소희는 전부 거절했다.
하지만 이것도 어느 정도 꾸몄을 때의 얘기였다. 편한 차림이면 그냥 꼬맹이나 다름없었다. 멀지 않은 편의점을 가는데 누가 빡세게 차려입고 갈까. 그래서 소희는 주민등록증만 챙겨서 조금 걸어서 나오는 다른 편의점으로 향했다. 그리고 캔맥주와 안주를 골라갔다.
당연히 알바생은 미심쩍은 눈으로 소희를 보았다. 기껏 해야 중학생 정도 되보임직한 여자애가 맥주를 가져오니 누가 의심하지 않을까.
“민증 보여주시겠어요?”
“아.”
올 게 왔다. 소희는 옅게 웃으며 신분증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알바생은 여전히 미심쩍은 얼굴이었다. 그야 신분증의 사진은 훨씬 어른스러웠다. 풀 메이크업에 포토샵의 힘……! 그렇다고 이걸 안 믿기에는 사진과 어느 정도 닮았지만…… 안타깝게도 알바생은 이런 쪽으로 한 번 데인 경력이 있었다.
“저기, 미안한데 아무리 언니꺼라고 해도 신분증을 함부로 가져가면 안 된단다?”
그 한 마디에 소희의 얼굴에 웃음기가 싹 가셨다. 기껏 용기를 내서 다른 편의점에 왔더니 이런 충고나 듣게 되었다. 심지어 그 알바생의 얼굴에는 한 점 의심도 없었다.
메스껍다. 알바생의 진심 어린 걱정이 역으로 소희의 목을 졸랐다. 소희는 굳은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차마 그 손에서 낚아챌 수 없었다.
“술은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마시렴. 알았지?”
“……네.”
속이 쓰렸다. 당장 점주에게 전화를 걸어 따지고 싶었다. 어른스럽게 꾸미고 돌아와 진짜 나라고 항의하고 싶었다. 어떻게든 자신을 어리게 보는 이 사람을 혼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소희는 그대로 편의점을 나섰다. 그리고 점점 빠른 걸음으로 가다가 갑자기 내달렸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까지 달리고 또 달리다 결국 숨을 헐떡이며 주저앉았다.
술집에서도 종종 이런 오해가 있었다. 피시방도 그랬다. 그래서 소희는 어느 곳도 함부로 나다닐 수 없었다. 친구들이 도와주기도 했고 단골을 알아본 사장이 넘어가주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 하나 달갑지 않았다.
대체 왜? 남들이랑 똑같이 나이를 먹는데 겉모습은 전혀 자라지 않는 듯 했다. 남들은 부럽다고는 하지만 소희는 전혀 좋지 않았다. 성격이 독해진다면 모르겠지만 그럴 수 없었다. 소희는 모질지 못했고 모두에게 다정다감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속마음으로 험한 말을 하는 게 끝이었다.
차라리 자신이 남자였더라면. 그랬다면 좀 더 편했을지도 몰랐다. 적어도 수염이 있었다면 이런 오해는 사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좀 더 용기를 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남자니까 얕보이지도 않을 테고, 모두가 존중해줄 것이 분명했다.
“저기, 꼬마야 괜찮니?”
모르는 사람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땀범벅이 된 소희는 웃는 얼굴로 내민 손을 거절했다.
“괜찮아요.”
소희는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역시 거기 밖에 없다. 아무리 부담스럽다고 해도 거기서 도망칠 수 없었다. 편의점에서의 의심과 그걸 해명하려고 발버둥치는 자신이 너무 처량했다. 차라리 그 부담감을 안고 무인 편의점을 이용하는 게 백 배 나았다.
‘그래, 말하는 거야.’
소희는 자그마한 주먹을 굳게 쥐었다. 이번에는 기필코 그 꼬마에게 단단히 따지리라 다짐했다.
*
대훈 역시 이런 난처한 상황을 겪고 있었다. 그도 소희처럼 겉모습이 어려 보였고 수많은 난관이 있었다. 가장 큰 난관은 역시 군대였다.
“울 대훈이 꼬추 좀 만져볼까~?”
그냥 남자끼리 하는 장난이 아니었다. 대훈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같은 부대의 선임이 벌인 추악한 말장난과 성희롱…… 그걸 막아준 건 다름 아닌 동기였다. 그는 대훈을 호시탐탐 노리던 선임을 때려눕혔고 그 결과 선임은 부대 이동을 갔다. 동기 역시 큰일이 날 뻔했지만 대훈이 평생 살면서 낼 수 있는 용기를 다 쏟아 부어 빨간 줄이 그일 뻔한 건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용기를 전부 써버린 탓일까. 대훈은 예전처럼 털털하게 굴지 못했다. 기껏 해야 운동을 다니는 정도였지만 그것마저도 어릴 적 태권도 사범으로 알고 지내던 형의 도움을 받을 뿐이었다.
몸은 건강하고 힘도 그럭저럭 키웠지만 그게 끝이었다.
남들 다 자란다는 키는 조금도 크지 않았고, 근육도 안으로만 크는 건지 살이 조금도 붙지 않았다. 오히려 작은 키에 근육량만 늘어서 자신의 머리 높이까지 뛰는 묘기만 생겼다. 털도 제대로 자라나지 않고 솜털 하나 나지 않았다. 수염이라도 기르고 싶었지만 기껏 해야 뾰루지가 나는 게 고작이었다. 오죽하면 일회용 면도기로 턱과 다리를 밀어댔을까.
‘차라리 여자였다면 좀 좋아.’
이건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남자로서 작은 키와 귀여워보이는 외견은 큰 약점이었다. 남자들뿐만 아니라 여자들 사이에서도 얕보였다. 그나마 좋은 친구들이 있어서 홀로 남는 건 면했지만 영 좋지 않았다.
왜냐하면 친구들은 대훈과 달리 키도 크고 덩치도 좋았다. 개중에는 뚱뚱한 친구도 있었고 마른 친구도 있었지만 하나 같이 대훈과 한 뼘 이상 차이났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컸다. 특히 여자들과 비교하면 그 차이는 어마어마했다.
작긴 해도 여자들의 평균 신장은 훨씬 작으니 괜찮았다. 하지만 남자 쪽은 아니었다. 키의 편차는 훨씬 심해지고 그로 인해 대훈의 존재감은 더욱 부각되었다.
정말 여자였더라면 이렇게까지 불편하지 않았을 것이다. 남자들이 귀여워해주고 떠받들어 모실 게 분명했다.
‘여자였으면 키가 작아서 귀엽게라도 봐줬겠지. 어쩌면 남자 여럿 등골 빼먹고 다닐 수 있었을지도 몰라.’
대훈은 찬바람을 맞으며 새벽길을 걸었다. 무인 편의점에 더 가지 못하고 다른 곳을 찾게 되었다. 그렇게 찾아간 편의점에서는 소희 때처럼 형의 신분증이라 의심받았다. 차라리 그거면 다행이었다.
“너 이거 경찰에 신고하면 큰 벌 받는다. 알고나 있어?”
‘씨발.’
대훈은 혼쭐을 내주겠다는 알바생의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남자애들을 다그칠 때 종종 쓰는 수단이었다. 요즘 애들은 무서울 게 없었으니 경찰이란 이름을 대면 조금이라도 쫄 거라 생각했나보다.
“복무신조라도 읊을까요?”
“그런 게 통할 거 같아? 형 심부름이라 해도 절대 안 돼. 돌아가렴.”
대훈은 울화가 치밀었다. 마음 같아서는 욕을 퍼부어주고 뭐라고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유치하고 멍청한 짓거리인지 알고 있었다. 겉모습만으로 뭐라 하는 상대가 이상하다 해서 똑같이 욕을 하며 격하될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말조차 꺼내지 못했겠지만.
“……아, 예.”
대훈은 별다른 말 없이 신분증을 돌려받았다. 그리고 편의점을 나서는 그 순간까지도 알바생의 혼잣말이 들렸다. 참으로 티가 난다는 둥, 어린 녀석이 술이나 탐낸다는 둥…… 소위 말하는 꼰대나 할 법한 말들이 술술 나왔다. 분명 나이도 자기보다 어려보이는 데……!
하지만 그걸 아무리 말해봐야 누가 믿어줄까. 친구들조차 종종 헷갈릴 정도인데.
“역시 거기 뿐인가.”
기 싸움을 하는 것도 지쳤다. 그냥 사람이랑 대면하지 않고 마음 편히 물건을 사는 곳으로 가는 게 나았다. 그러려면 그 호기심 넘치는 장난꾸러기를 돌파해야 했다.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사람은 사람…… 충분히 대화를 나눈다면 쫓아낼 수 있을 것이다.
대훈은 이전처럼 휘둘리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운 좋으면 만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이번에도 운명처럼 만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
잔뜩 긴장한 것 치고는 두 사람의 만남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마음먹었던 게 허무하리만치 끝나고 말았다.
그래서일까, 두 사람은 다시 평화로운 예전 생활로 돌아간 듯 했다. 그래서인지 마음이 풀어졌고 그때의 일은 한 때의 해프닝이자, 술 안주 거리가 되나 싶었다.
“어.”
“아.”
소희와 대훈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냉장고 앞에서 만났다. 처음 만났을 때 그대로의 모습……!
말해야 한다. 그러나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마음먹은 그 날 만났더라면 한 소리 퍼부었겠지만 지금은 망설여졌다. 그때 굳힌 의지가 흐물흐물해졌다. 목소리가 목에 딱 걸려서 나오지 않았다. 의심하고 믿지 않는 알바생에게 한 마디 못했던 것처럼 가슴이 갑갑해졌다.
말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 평화가 다시 깨지고 만다.
두 사람은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다시 한 번 심호흡 하고.
“저기, 꼬마야.”
“꼬마야.”
?
두 사람은 잠시 얼이 빠졌다. 동시에 말을 한 건 둘 째 치고 상대가 한 말이 너무 어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꼬마?
이제는 눈앞의 어린 애가 어린 취급을 하고 있었다. 서로가 뱉은 한 마디가 지금까지 쌓아온 울분을 터뜨렸다.
“무슨 소리야, 꼬마라니? 내가 너보다 한참 누나거든?”
소희가 먼저 쏘아붙였다. 그러자 대훈은 황당해하며 맞받아쳤다.
“누나? 네가 누나라고? 어딜 봐도 나보다 한참 어린 녀석이 누구더러 누나래?”
소희는 소희 나름대로 황당했다.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맹이가 이렇게 대들 줄 몰랐다. 물론 어른이 말한다고 곧이곧대로 들어야 하는 건 아니었지만 덤벼드는 것도 아니었다. 그랬기에 대훈의 말대답은 영 달갑지 않았다.
“내가 어려 보인다고? 대체 어딜 봐서? 척 봐도 내 쪽이 훨씬 어른스러워 보이잖아.”
어른스럽다? 대훈 역시 소희의 말을 그냥 넘길 수 없었다. 눈높이는 얼추 비슷하긴 했다. 하지만 누가 봐도 어른인 건 대훈 쪽이었다. 무엇보다 이쪽은 군대까지 다녀온 어른이었다.
그러니 어이가 없었다. 키가 좀 작다고 만만하게 보고 이러는 게 분명했다. 겉모습으로만 판단하는 시건방진 꼬마에게 이런 말을 듣고 넘길 수 없었다.
“어이가 없네. 내가 너보다 먹은 밥그릇 수만 해도 몇 백 그릇은 될 거다. 근데 뭐? 어른스러워 보여? 이 쪼끄만 게 어디서……”
쪼끄매?
소희와 대훈은 이를 갈며 으르렁거렸다. 그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얘들아, 싸우지 마렴.”
웬 아저씨가 다가와 두 사람을 가로막았다. 그는 난처한 얼굴로 소희와 대훈을 번갈아보더니 한 명 한 명에게 말했다.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돌아다니면 안 되지. 요즘 밤거리가 얼마나 위험한지 아니?”
“그리고 원래 애들이 싸우면서 큰다지만 이렇게 공공 장소에서 싸우는 건 옳지 않단다.”
“그러니 둘이 손잡고 화해하렴. 누가 잘못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사과를 하는 게 우선이란다.”
그야말로 애를 달래듯 나긋나긋한 말투. 오히려 그 말투가 두 사람의 폭발한 감정을 부추겼다.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전 성인이에요! 대학도 졸업반이고 일도 하고 있다구요!”
“저 군대도 다녀왔어요! 누구를 애 취급하시는 거예요! 저도 알 거 다 알고 할 거 다 했다구요!”
하필 두 사람의 소리가 겹쳐버렸지만, 아저씨는 뭔가 잘못 됐단 걸 깨달았다. 그리고 소희와 대훈이 동시에 상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애는 얘라구요!”
“애는 이 꼬마죠!”
“뭐야?!”
“뭐라고?!”
“어……”
소희와 대훈은 평소 소심하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이 이를 드러내며 화를 냈다. 둘의 불같은 기세에 아저씨는 머뭇거리다 머릿속으로 상황 정리를 끝냈다.
“저기…… 일단 둘 다 겉모습보다 어른인 거 같으니 대화로 푸세요. 그럼 전……”
“예?!”
“네!?”
“어른인 건 저 뿐이라고요!!”
마지막 한 마디는 두 사람이 동시에 외쳤다. 그제야 두 사람은 이상한 걸 알아채고 서로를 보았다. 그 틈을 타 아저씨는 도망갔고…… 소희와 대훈은 멀뚱히 상대를 바라보았다.
*
“푸흐흐흐흐……”
“흐흐흐……”
소희와 대훈은 새벽 공원 벤치에 앉아 실성한 듯 웃고 있었다. 두 사람의 손에는 각자 사려던 캔맥주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그러니까 대훈 씨도 그런 오해를 했단 거죠?”
“예. 지금 생각해보면 진짜 어이가 없네요.”
두 사람은 서로의 신분증을 확인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했던 오해를 되새기며 대화를 나누었다.
처음에는 황당했다. 자신과 같은 사람이 있었단 것이 신기했다.
그 다음은 허탈했다. 진즉 말을 건넸더라면 이런 오해는 없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웃음이 나왔다. 자신이 평소 당한 게 있으면서 상대에게 그 짓을 똑같이 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일말의 가책도 없었다.
“누가 보면 뭐하나 싶었겠어요.”
“그러게 말이에요. 근데 그 아저씨 반응 보면 애들끼리 싸운 줄 알던데……”
“크흡……”
소희는 맥주를 마시다 말고 고개를 옆으로 꺾었다. 하마터면 맥주를 코로 뿜을 뻔했다.
“아, 그 말 하지 마요. 지금 생각하니까 창피하잖아요.”
“그쵸? 말할까 말까 하다가 한 건데, 하지 말 걸 그랬나봐요.”
“아, 완전 부끄러워…… 심지어 애들 싸움이라고 오해 받은 것도 부끄러운데 남들한테 그렇게 소리친 것도 처음이에요.”
“그쪽도요?”
대훈은 캔을 입에 대다 말고 말했다.
“저도 그랬어요. 이제까지 말하기 눈치 보였거든요. 뭔가 말하려니까 무섭기도 하고……”
소희는 가만히 말을 듣고 있다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다 허탈한 듯이 물었다.
“……남자들도 그래요?”
“뭐, 남자라고 안 무서운 게 있겠어요.”
“그렇구나.”
왠지 모르게 가슴 깊은 곳에서 북받치는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친구들한테만 말하기 편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대훈과의 대화는 엄청 편했다. 몇 번 마주치기 했지만 실질적으로 얘기를 나누는 건 처음이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안정되다니……
그래서일까, 소희는 가슴 속에 있던 얘기도 꺼내놓았다.
“저는 차라리 남자였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자꾸 겉모습으로 무시당하고 그러니까……”
“설마요. 남자면 더 힘들어요.”
“진짜요? 수염이나 털만 보여도 어른으로 볼 텐데…… 안 그랬어요?”
“아-”
대훈은 머쓱해하며 바지를 슥 걷었다. 따로 제모를 했나 싶을 정도로 매끈한 다리였다.
“성장 호르몬이 안 나와서 그런 건지 키도 안 크고, 털도 잘 안 자라더라구요. 그래서 매번 다리든 턱이든 면도기로 밀어대는데도 검은 털 하나 안 자라요. 그리고 남자라고 편한 건 또 아니에요. 오히려 남자인데 이렇게 작고 그러면 더 자괴감이 들거든요. 제 친구들 못 봤죠? 전부 올려다 봐야 해요.”
대훈은 그렇게 말하다 잠시 말문이 막혔다. 군대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할 뻔했다. 하지만 구태여 그것까지 말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다른 얘기로 넘어갔다.
“저는 오히려 여자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 했는 걸요? 그것도 그럴 게, 여자는 키가 작아도 예쁨 받잖아요. 남자는 아무리 돈 많고 잘 생겨도 키가 작거나 대머리면 싫어하거든요.”
“예? 그럴리가요.”
이번에는 소희가 놀라서 반문했다.
“제가 화장하고 꾸미면 어떻게 되는 지 아세요? 언니나 엄마꺼 화장품 빌렸냐고 해요. 조금이라도 과하게 하면 애가 어른스러운 척 하는구나, 그런 뒷담도 듣는다니까요? 설사 예쁘단 소리를 들어도 좋진 않아요. 그쪽 취향인 사람이 대부분이고, 그게 아니면 여동생마냥 귀여워하니까요. 아무튼…… 그래서 섹시한 옷도 못 입어요. 사이즈 맞는 옷도 찾기 힘들구요.”
“아, 사이즈…… 저도 그래요. 그래서 언젓번에는 아동복 코너를 가야 하나 고민했다니까요.”
“네? 아하하하-”
“그래서 그냥 안 갔죠. 미아 신고 당하기 싫거든요.”
“아니~ 푸흐흐흐-”
대훈은 소희의 말을 듣고 의외란 생각을 했다. 서로가 성별이 바뀌었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고, 그게 그렇게 좋지 않단 것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좋은 분위기로 계속 대화를 나누었다. 지금까지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고충을 겪었는지 알게 되었다. 술 기운이 올라왔을 때는 조금 더 깊은 얘기까지 나눌 수 있었다.
소희의 경우 여동생처럼 여겨지고 첫 사랑에게 허무하게 차인 얘기…… 대훈의 경우 연하에게 고백했다가 남자인 줄 몰랐다는 말을 들었던 얘기……
키가 작아서 계속 누군가의 팔받침대로 사용된다든지, 냉장고 높은 칸에 손이 안 닿는다든지,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낼 발이 둥 뜬다든지, 의자에 앉을 때 발이 안 닿는다든지……
그들은 지금까지 겪었던 불쾌한 얘기를 하면서 누구보다 유쾌하게 웃었다. 그러다 종국에는 무인 편의점에서 서로의 집이 그리 멀지 않단 걸 알게 되었다.
세상에 이런 우연의 일치가 있을까. 첫 만남 때도 그렇고, 그 후의 만남도 그렇고…… 하나 같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썩 나쁘지 않은 우연이었다. 이 정도면 기적을 넘어 운명이란 생각까지 들었다.
“번호 알려줘요.”
대훈이 벌겋게 달은 얼굴로 말했다.
“싫어요.”
소희는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대훈 씨가 찍어줘요.”
“어어, 내가 번호 따려 했는데……”
“여자 쪽에게 번호 따인 게 더 좋지 않아요?”
“쓰읍, 그것도 나쁘진 않은데……”
소희는 쿡쿡 웃으며 대훈에게 받은 번호로 문자를 보냈다.
까톡-
그리고 대훈은 카카오톡으로 답장했다.
“대신 첫 톡은 제가 합니다?”
“이열, 남자다우신데요?”
“읏흠.”
대훈은 소희가 치켜세워주니 콧대를 세우며 가슴을 쭉 폈다. 소희는 빵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연락처를 교환한 두 사람은 종종 무인 편의점에서 만나 얘기를 나누었다. 때로는 직장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거나, 이전에 자신에게 민폐를 끼쳤던 썰을 풀기도 했다.
어느 샌가 소심하고 소극적이던 두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속내를 털어내고 즐겁게 대화를 한 이후부터는 자신감 넘치고 흥겨운 사람으로 서서히 변해갔다.
새로 만난 술친구…… 그리고 서로의 고충을 공감할 수 있는 말동무…… 그건 정말 사소한 일로 시작되었다. 둘의 소심했던 마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