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윤은 민지와 연락을 마치고 카페 2층에서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있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민지가 올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있는 혜윤과 지금 함께 있는 친구들은 자기보다 먼저 민지와 친구인 관계이며, 혜윤이 민지와 친해지면서 알게 된 친구였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같이 술도 먹고 놀러도 가고 하다보니 죽이 잘 맞는 친구들이구나. 혜윤은 생각했다.
"아, 혜윤아 가서 이거 얼음 좀 리필해줄래?"
"가는 김에 이거 휴지도 좀 버려주라"
"응 나한테 줘. 내가 해줄게."
혜윤은 자연스레 부탁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음을 리필하기 위해선 1층으로 내려가야 했기 때문이였다.
"민지 늦네 근데. 오늘 오긴 한대?"
친구의 물음에 혜윤은 대답했다.
"아, 내가 한번 더 연락해볼게. 미안해."
혜윤이 미안해 할 필요는 전혀 없음에도 늘 그렇듯 민지대신 자신이 사과했다. 혜윤은 얼음컵을 들고 쓰레기를 쥔 채 카운터로 내려갔다.
쓰레기를 버리고 얼음컵의 얼음을 리필하며 혜윤은 민지에게 카톡을 보냈다.
'민지야 어디야?'
'카톡!'
휴대전화에서 울린 소리에 민지는 자기도 모르게 흠칫 놀라고 말았다. 지혜는 그 소리에 돌아보며 말했다.
"아 맞다. 카톡 알림음도 바꿔야했는데. 그건 나중에 니가 꼭 바꿔?"
민지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혜윤이 자신을 찾는 카톡이였다.
'이 씨발... 너때문에 카톡까지 못 받게 됐잖아!'
민지는 화가 치밀어 혜윤에게 답장했다. 혜윤만 아니였다면 카톡 알림음을 바꾸는 것까진 안해도 되는 것이였다.
'근처 골목이야. 왜 이렇게 보채? 고작 그것도 못 기다려?'
예상과 다르게 날 선 민지의 답변에 당황한 혜윤은 지금 당장 민지에게 전화를 걸어 사과해야하나 생각이 들었다.
그때 직원이 리필한 얼음컵을 내밀었다.
"여깄습니다 고객님."
"아... 고맙습니다."
혜윤은 우선 얼음컵을 받아 올려주곤 민지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서둘러 계단을 오르던 혜윤에게 두 친구의 대화소리가 들렸다.
"야 근데 최민지 왤케 비싼 척 해? 쉬는 날 내내 받지도 않고."
"몰라~ 걔 생각을 우리가 어떻게 알아."
"아 나 민지 없이 쟤랑 있기 불편하단 말야. 쟤 알지? 민지가 뒤에서 수작친 거."
"그럼~ 그래서 쟤가 민지한테 죽고 못 사는 거잖아."
혜윤은 이해할 수 없는 대화내용에 패닉에 빠졌다.
사람인지라 누구나 뒷담화는 할 수 있다. 그 정도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민지 이야기는 달랐다.
과거 타인에게 자살을 결심할 정도로 괴롭힘을 받던 혜윤은 민지가 그들과 맞서 싸워줌으로서 구원 받았다고 생각했다.
민지는 혜윤에게 빛이였고, 인생 가장 소중한 친구였다.
그렇기 때문에 혜윤은 민지의 투정이나 부탁을 절대 거절하지 않았고 민지의 친구들 부탁 역시 민지를 생각해 가능한 도와주었다.
그런데 뒤에서 수작쳤다니? 자기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나?
혜윤은 둘의 대화를 좀 더 듣기로 했다.
"아니 얘는 얼음 받으러 와서 왜 이렇게 안 와?"
"아 냅둬 원래 멍청한 얘잖아. 그러니깐 민지가 자기 괴롭힘 주도한 것도 모르고 민지를 주인님마냥 모시는 거지."
"ㅋㅋㅋ하긴 그거 아니였으면 저렇게 지극정성으로 섬기겠어?"
혜윤은 큰 충격에 들고 있던 얼음컵을 떨어뜨렸다.
깨지는 소리에 놀랐는 지 위에서 들리던 대화도 끊겼다.
"뭐야? 설마..."
민지의 친구들은 일어나 계단쪽으로 향했다. 계단엔 큰 충격에 넋이 나간 혜윤이 서 있었다.
"혜...혜윤아 너 설마 들은거야?"
"그거 진짜아니야. 믿는거 아니지? 그치?"
이미 혜윤은 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혜윤은 계단을 올라 둘의 어깨를 치곤 자기 자리에 있던 가방을 들고 나왔다.
유리컵 깨지는 소리에 올라온 직원이 당황스럽게 서 있었다.
"죄송해요. 제 번호 적어드리고 갈게요. 나중에 연락주시면 변상할게요."
가능한 덤덤하게 말하곤 혜윤은 자기를 붙잡는 친구들을 떨쳐내고 카페 밖으로 나갔다.
여름의 찌는 듯한 더위였지만 혜윤은 오히려 춥게 느껴졌다.
민지에게 진실을 듣고 싶었다. 민지는 근처에 있다고 했었다.
혜윤은 그저 발 닿는대로 걸었다. 왠지 걷다보면 최민지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혜윤의 귓가에 민지 목소리로 들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저 안쪽 골목에서 들려왔다.
민지는 지혜를 따라 뒷 골목으로 들어왔다.
이곳은 자신이 가끔 담배피려고 들어오는 곳이였고 cctv도 없고 안을 보는 사람도 왠만하면 없는 곳 이였다.
민지는 지혜가 자신을 여기로 데려온 이유에 대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자, 이쯤 왔으면 됐나?"
지혜는 민지에게 말했다.
"겨드랑이 좀 보여줄래?"
민지는 지혜의 지시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나마 상상했던 것보단 약했고, 아까까지 자신이 당했던 것에 비하면 차라리 선녀였기에 냉큼 팔을 올려 털이 북실북실한 겨드랑이를 보여줬다.
"이것만 하고 끝내줄게. 네 겨드랑이 냄새를 맡고 큰 소리로 소감을 말해줘. 음~ 한 2분정도?"
이것만 하고 끝내줄게.
민지가 가장 기다려온 말 이였다. 솔직히 지혜가 집으로 가면 휴대폰은 진동으로 하든 무음으로 하든 알 방법이 없지 않는가?
지혜를 얼른 보내고 소리를 전환하고 쌓인 스트레스를 친구들과 풀고 싶었다.
민지는 냉큼 겨드랑이에 코를 대고 킁킁대기 시작했다.
여성 특유의 시큼하고 톡 쏘는 겨드랑이 냄새가 민지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민지의 보지는 슬쩍 젖어오기 시작했다.
지혜가 노트로 자신을 냄새패티쉬로 만든 것은 민지는 알 지 못했다.
"시큼하고 톡쏘는 식초향이, 코에서 맴도는데 어째서인가 코를 뗄 수 없는 중독성이 나. 맡을 수 록 보지가 젖어오고 있어...!"
민지는 지혜의 취향이라고 생각되는 단어들을 골라 말하기 시작했다.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이 역시 음담패설이나 추잡한 말이 우선적으로 떠오르게 만든 지혜의 탓이였다.
"이 냄새라면 하루종일도 맡을 수 있어. 내 방귀냄새만큼 독해 이건! 이 냄새 맡으면서 자위하라고 하면 나는 기쁜마음으로 할래!"
지혜는 민지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않고 그저 웃고있을 뿐이였다.
민지는 이상함을 느꼈지만 지혜를 만족시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외쳤다.
앞 뒤로 허리를 흔들흔들 거리며 민지는 말했다.
"아! 나도 모르게 허리가 저절로 흔들려. 내 앞에 자지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박고 싶...!"
"뭐....해?"
민지는 귀를 의심했다.
방금 들린 목소리는 이 자리에 있어선 안된다.
방금 들린 목소리의 주인이 이 광경을 봐선 안된다.
방금 들린 목소리는 자신이 아주 잘 아는 인물의 것이다.
민지는 팔을 천천히 내리고 굳어 버린 몸 대신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자신이 잘 못 들은 것이 아니였다. 민지의 눈 앞에는 근처 카페에 있을 것이라던 혜윤이 있었다.
혜윤 역시 숨이 멎을 듯한 표정으로 민지를 보고 있었다. 민지의 앞에는 민지와 같은 반의 김지혜라는 아이가 서 있었다.
어째서?
어째서 쟤 앞에서 저러고 있는 거지? 저런 짓을 할거면서 왜 나한테 성질을 낸 걸까? 아니, 이런 분위기에서 나는 진실을 알 수 있을까?
아무도 오지 않을 골목에선 숨이 막힐 듯한 정막만 흐르고 있었다.
'찰칵'
정막을 깬건 지혜의 휴대폰 카메라 소리였다. 그 소리에 의식이 돌아 온 듯 혜윤은 민지가 아닌 김지혜를 바라보았다.
키작고 뚱뚱하고 못생기고 추한 김지혜는 세상 당당한 모습으로 미소지으면서 혜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지혜는 말했다.
"안녕 이혜윤. 난 김지혜라고해. 우리 최민지에 관해 이야기 좀 할까?"
민지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혜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민지와 지혜가 만나기 전, 지혜는 노트의 항목을 정리하다 혜윤의 존재를 알 게 되었다.
오직 최민지 만이 아는 진실이였지만 지혜에게 그것은 무의미했다.
혜윤의 항목을 보던 지혜는 혜윤이 자신이 못하는 새로운 조교를 담당할 인재라고 생각했다.
지혜가 아무리 노트가 있어도 미령보다 펨돔 플레이를 잘 하지 못 하는 것 처럼 지혜는 민지의 일상을 모두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예를 들어 민지가 자기 친구들과 함께 밥을 먹고 있다면 그곳에 같이 껴서 민지의 일상을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민지는 아직까지 주변인물들에게 미인 취급을 받고 있었고 지혜는 그들에게 있어 못생긴 찐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였다.
하지만 혜윤은 달랐다.
민지가 친구들끼리 어디 놀러가거나 취미생활을 보낼 때.
그곳에 끼지못하는 지혜와 달리 혜윤은 부담없이 낄 수 있었다.
사실 슬슬 일상생활에도 힘쓰기 위해 조교를 분할하고자 생각하던 지혜는 가능하면 미령처럼 자신이 못하는 영역에서 민지를 망가뜨려주는 사람이 필요했다.
노트를 통해 혜윤을 직접 조종할 수는 없지만 민지와 얽혀 간접적으로 나마 조종할 수는 있었다.
새벽, 지혜가 추가한 사항은 이러했다.
'민지는 지혜를 따라간 골목에서 왕따사건의 진실을 들은 혜윤에게 추태를 들킨다.'
이후는 지혜 본인이 시간과 타이밍을 계산해 촬영을 마치고 민지를 데리고 가면 될 뿐이였다.
그리고 상황은 현실로 돌아온다.
지혜를 따라가며 혜윤은 민지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민지 역시 뭐라 변명하고 싶었지만 지혜는 민지에게 속삭이듯 입 다물고 죄 없다는 듯 혜윤을 노려보라는 지시를 내렸고 민지는 지지않고 혜윤을 노려보고 있었다.
만약 원래였다면 혜윤이 진실을 알더라도 민지의 교활함과 언변으로 인해 오해라고 생각하고 마음이 풀릴 혜윤이였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지혜가 혜윤의 마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지혜가 선수친 것이다.
지혜는 혜윤과 민지랑 함께 택시에 타고 번화가로 향했다.
민지에겐 익숙한 번화가였다. 밤에 미령에게 조교 받기 위해 향하던 번화가였다.
미령은 지혜에게 오피스텔 번호키를 알려주며 공동의 집으로 사용하기를 제안했고, cctv도 듣는 이도 없는 곳이 필요하면 이용하라고 했다.
사실상 이곳은 공용 최민지 조교방이였던 것이다.
딱 하나 단점은 번화가 까지 가기 불편하다는 것이였지만 지금은 어차피 택시로 이동할 것이라도 이용하기로 했다. 이제부터 할 것은 혹시라도 듣는 이, 보는 이가 한 명도 없어야만 했다.
민지의 돈으로 택시비를 내자 혜윤은 놀랐지만 티를 내지 않도록 했다.
김지혜와 최민지. 둘 사이 무언가가 있는 것은 분명했지만 혜윤에게 지금 그건 중요치 않았다.
최민지와 당장 대화하고 싶었고 택시에서도 계속 작게 말을 걸었지만 지혜로부터 받은 지시때문에 민지는 모두 대답하지 않았다.
혜윤은 오히려 그것때문에 더 속이 상했다.
지혜의 오늘 목적은 혜윤과 민지의 인간관계 파탄을 넘어서 혜윤이 지혜만큼 민지를 증오해 적극적으로 인생 망가뜨리기에 동참하는 것이였다.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서자 이곳 저곳 성인용품이 뒹굴고 있었다. 미령이 애용하는 sm물품이였다. 혜윤은 처음보는 성인 용품에 놀라 얼굴을 붉혔지만 둘은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아 평정을 유지했다. 지혜는 둘을 테이블로 안내하며 말했다.
"자, 궁금한게 많을텐데. 나한테 이것 저것 듣기 전에 둘이 대화하도록 해. 아 참, 민지도 혜윤이도 둘 다 무조건 '진실'만을 말하도록 해 아, 민지는 대답만 해주면 좋겠어."
지혜는 이렇게 말하곤 차를 타오겠다며 부엌으로 향했다.
지혜와 민지 둘만의 대화시간이 찾아왔다.
"최민지."
"응"
지혜의 말하지말라는 지시가 풀렸기에 민지는 드디어 말 할 수 있었다. 이건 기회였다. 민지 자신이 도움 받을지도 모르는 유일한 길이였다.
민지는 혜윤에게 자신이 처한 상황과 방금 전 추태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혜윤의 질문은 민지의 예상에 전혀 빗나가는 것이였다.
"OO에게 들었어. 솔직히 말해줘. 과거에 나 왕따시킨 진짜 주동자. 너야?"
민지는 당황했다.
왜 이 질문을 하필 여기서 하는 걸까? 아까 내 추태는 관심도 없다는 걸까?
그보다도 이 질문에 대해 마땅한 변명을 해야만 했다. 혜윤이 등 돌아서면 자신을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게되어 버렸다.
혜윤은 내심 생각했다.
민지가 부정해주길 바랬다.
혜윤은 그때 왕따사건으로 손목을 그었고, 그 일을 목격한 혜윤의 어머니는 아직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가지고 계셨다.
매일같이 괴롭힘 당한 일 때문에 아직도 자다가 가끔 빗자루 같은 걸로 얻어 맞던 꿈을 꾼다.
그렇기 때문에 부정하길 바랬다. 그렇지 않으면 민지를 위해 지내온 지난 자신이 너무 비참할 것 같았다.
"응, 너 멍청하고 단순해보이는데 얼굴만큼은 그럭저럭이라. 내 노예로 쓰면 딱 좋을 것 같았어."
하지만 민지의 대답은 상상 이상이였다. 민지 본인조차 놀랐지만 진실만을 대답해야하는 민지였기에 거짓말은 불가능 했다.
"노예? 그게 뭔데."
혜윤의 질문에 민지는 깔보는 듯한 태도를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뻔하잖아. 나를 더 빛나게 만들어 줄 가짜친구. 딱 너같이 내 부탁 거절 못해서 스스로 저질 개그나 치며 이미지 망치고 나를 더 빛나게 해주는 애들."
민지의 대답에 혜윤은 지난 시간동안 자신이 민지와 함께했던 시간을 떠올렸다.
작년 여름 워터파크에선 몸매에 자신없던 혜윤에게 억지로 비키니를 입혔었다.
그때 민지는 정색하며 누구보다 예쁜데 왜 자신을 숨기려 하냐고 말했다.
하지만 사실은 자신과 비하면 비율도 그럭저럭에 약간 뱃살 나온 혜윤을 옆에 붙여 완벽한 자신을 더 완벽하게 보이기 위함이였다.
같이 했던 남자와의 술자리에선 민지가 적극적으로 한 오빠와 자신을 붙여줬었다.
하지만 사실은 그 중에서 제일 못 생겼던 오빠였다. 민지는 모두가 처음부터 마음에 들어했던 제일 잘 생긴 오빠와 연락했다.
친구들과 놀러가면 역시 선곡은 혜윤이지 하곤 함께 즐겼다.
하지만 사실은 뽕짝같은 이상한 노래를 시켰었다. 바로 이후 자신은 슬픈 발라드 같은 걸 선곡해 자신의 음색을 뽐냈다.
지금 돌이켜보면 자신은 항상 첫 선발대, 희생양이였고 장난감이였다. 은인이라는 이유로 민지와 민지 주변 인물들의 모든 부탁을 거절하지 않는 부하였다.
어째서 한번도 거절하지 않았을까. 어째서 한번도 의심하지 못했을까.
자신의 멍청함에 비참함을 느끼며 혜윤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한테 미안한 적은 있어?"
마지막.
정말 마지막.
이혜윤이라는 인간이 최민지라는 쌍년을 용서할 수 있는 마지막 질문이였다.
만약 여기서 진심을 다해 사과한다면 그저 절교하는 것으로 민지를 용서할 생각이였다.
어차피 최민지란 인간에게 덤벼도 자기에게 득이 없기 때문에 이정도로 끝내는 걸로 만족하자 생각하려 했었다.
"전혀? 억울하면 니가 잘났어야지 ㅋㅋㅋ 병신같은게 놀아주니까 나랑 같은 급인 것 같디?"
민지의 본심이 어떻든. 지혜는 그저 진실을 답하라고 지시했고. 이것이 민지의 진실이였다.
혜윤은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자리에서 민지를 죽이고 싶었다. 머리를 붙잡고 내동댕이 치고 싶었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혜윤의 속에서 들끓었다.
"이만하면 대화는 된 듯하네. 자, 민지야 촬영하자."
지혜가 부엌에서 나오며 민지에게 말했다.
민지는 갑자기 실 풀린 인형마냥 바닥에 누워 축 쳐지기 시작했다.
"뭐야?"
상황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혜윤은 지혜를 쳐다봤다.
그러고보니 아까부터 이 년은 혜윤과 민지사이에서 자꾸 얄미운 시누이짓을 하고 있었다.
"넌 뭔데? 새로운 최민지 노예야?"
과거의 자신에게 보내는 듯한 자조섞인 목소리. 지혜는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지 우선 민지에게 지시를 내렸다.
"민지야. 오늘 고생했어. 먼저 집에 들어가. 아참 차비는 주고 가. 집에 가면 원래대로 돌아가고. 아, 그래도 지금 오후 5시니까 이따 4시간 뒤에 미령언니 보러는 와야해?"
그 말에 민지는 책상위에 5만원 지폐를 한장 올려두고 묵묵히 밖으로 나갔다. 혜윤은 왜 최민지가 김지혜의 말을 따르는 지 알 수 없었다.
지혜는 가져온 오렌지 주스를 권하며 말했다. 잘 보니 음료도 애초부터 두 잔 밖에 가져오지 않았다.
"우선 미안해. 본의 아니게 상처를 줘서. 네가 진실을 깨달은 건 나 때문이야."
혜윤은 이해하지 못했다. 니가 뭔데? 니가 뭘로 상처를 줬다는 거야?
지혜의 외형만으로 판단한 혜윤은 오타쿠가 자기 망상 헛소리 하는 건가? 싶었다.
"우선 들어줘. 이건 모두 진실이니까."
지혜는 처음, 민지때문에 자살하고 싶었던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모든 진실을 혜윤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 그 말을 내가 믿으라고?"
혜윤은 지혜의 이야기를 듣자니 두통이 밀려왔다. 괜시리 갈증이 나 마시던 음료수는 어느 새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그니까 너한테 최민지를 조종하는 만능 노트가 있고 쉬는동안 한번 인생을 망쳤으며, 그 커다래진 엉덩이도 네 작품이다?"
혜윤은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야기 중간중간 지혜가 보여주는 지원사이트나 민지로 추정되는 미나라는 인물의 추태. 그리고 최근 민지가 이상했음을 생각하니 앞 뒤는 맞았다.
"그래서 나한테 왜 이런 말을 하는거야?"
지혜는 생각했다.
처음부터 이쪽 성벽을 가지고 있던 미령은 포섭이 매우 쉬웠다. 본인도 매일 만족하기도 하고.
하지만 혜윤은 아니였다. 애초에 이쪽은 잘 알지도 못하는 일반인이였을테고, 아무리 최민지가 미워도 이건 아니다! 하면 곤란해지는건 지혜였다. 그렇기에 혜윤을 아군으로 끌어들이려면 모든 패를 밝혀야했다.
지혜는 대답했다.
"네가, 최민지를 노예로 써먹었으면 좋겠어."
혜윤은 잠시 말이 없었다.
내가.
최민지라는 콧대 높은 여자를.
자신의 인생을 망칠 뻔하곤 그걸 이용해서 나를 가지고 놀던 그 년을.
이젠 오히려 내가 노예로 부린다?
혜윤은 몰랐겠지만.
지혜는 됐다! 라고 생각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혜윤의 입꼬리는 어느 새 올라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혜의 도박이 다행스럽게도 먹혀들었다.
"좋아, 대신 조건이 있어."
지혜는 당황했다. 조건이라고? 네가 나한테? 하지만 생각해보면 혜윤은 아직 이쪽 사람이 아니였고, 지금 당장 경찰서로 달려가면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 조건을 들어보기로 했다.
"좋아, 뭔데?"
혜윤은 대답했다.
"나도 그 노트에 원하는 항목을 적고 싶을 땐 적게해줘.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지혜는 혜윤의 조건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야 뭐. 라고 생각했다.
직후 혜윤의 말을 듣기 전까진.
"앞으로 최민지는 친구와 만나려면 무조건 이혜윤과 함께 해야하며 화장실이 가고 싶을 때는 반드시 이혜윤의 허락을 맡는다. 라고 추가해 줘."
지혜는 알겠다고 답하며 웃었다.
시작을 보아하니 혜윤 역시 이쪽 적성이 매우 잘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