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 그럼 특별히 되돌려줄게."
"응 제발 부탁해.. 지혜야."
여기서 돼지코로 인생을 살게 하는 것도 재밌었겠지만 소민이 천천히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고 싶었던 지혜는 이번엔 한번 물러나주기로 결심했다.
자신의 손으로 언제든지 인생을 한번에 망칠 수 있다는 걸 보여줬으니 아무리 자존심 쎈 소민이라도 더이상 대들지 못할 것이였다.
다만 그냥 돌리긴 아쉬웠던 탓에 지혜는 소민의 몸과 인식을 되돌려주면서 소민 몰래 한 가지를 추가했다.
'후각이 예민해짐. 포만감이 느껴질 때 까지 음식을 먹으면 30분간 돼지코로 지내게 됨.'
이것 역시 소민이 잘 참아낸다면 문제없이 지낼 수 있는 항목이였다.
과연 이미 음식의 맛을 알게 된 소민이 참아낼 수 있을까 의문이였지만 지혜는 그것 또한 지켜보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았다.
"그, 그럼 난 가봐도 될까?"
전화를 확인해보니 아까 전화를 언제했냐는 듯 소민의 친구인 연수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거울을 봐도 코가 원래의 예쁜 소민의 오똑한 코로 되돌아가 있었다. 소민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지혜에게 고개를 숙이곤 말했다.
"고마워. 진짜 조심할게.."
소민은 지혜에게 대들면 안되겠다 라고 깨닫게 되었다. 굽신 허리를 숙인 소민은 혹시 뭐라도 또 당할까 두려워 가방을 들고 헐레벌떡 오피스텔 밖으로 나갔다.
그런 소민의 뒷 모습을 보며 지혜는 쇼파에 앉았다.
이제 곧 민지가 올 것이였다. 민지에겐 어떤 치욕을 안겨줄지 생각 했다.
"후우.. 후우.."
너무 긴장한 탓에 약간 과호흡 증세가 온 소민은 밖으로 나가자마자 신선한 공기를 힘껏 들이마시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하마터면 그대로 소민의 인생이 끝날 뻔 했다는 생각에 아직도 끔찍했다.
"김지혜.. 어떻게든 저 노트를 뺏어야.."
노트의 위력을 느낀 소민은 조심해야겠다고 대책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킁..킁킁.. 이 냄새.."
집으로 가는 버스를 찾기위해 길을 걷던 소민은 코를 강하게 자극하는 맛있는 냄새에 코를 벌름거리며 냄새가 나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노상에 있는 만두집에서 만두를 찌는 냄새였다.
평소라면 거들떠도 보지않는 곳인데 오늘따라 냄새가 소민을 미치게 만들었다.
'꾸르르르륵'
"아.."
소민은 다시 요동치는 배 위에 손을 올리며 군침을 삼키곤 만두를 바라봤다.
그래도 만두정도면 살이 안 찌지 않을까. 저 정도면 먹어도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소민은 천천히 주머니에 손을 넣어 지갑을 꺼내려고 했다. 그때 소민의 휴대폰이 울렸다.
'띠링'
열어서 확인해보니 단톡방이였다.
유나 아줌마: 미안 애들아 나 오줌 쌀 것 같아
"아이 씨.."
소민은 주위를 둘러보며 재빨리 화장실을 찾아 달렸다.
짜증내는 소민이였지만 본의 아니게 유나에게 도움을 받은 셈이였다.
만약 유나가 아니였으면 소민은 지금 정신없이 만두를 사서 우걱우걱 입에 집어넣고 있었을테니까.
집으로 돌아온 소민은 부모님께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벌써 몇 년 째 소민은 가족들과 거의 남남으로 지내고 있었다.
예전에 한번 가족들에게 제발 살 좀 빼라고, 쪽팔리다고 항의 한 적이 있었으나 아무도 소민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고 소민 역시 말해도 변화가 없다는 걸 알자 같이 식사를 안 하는 것부터 시작해 지금은 거의 교류가 없었다.
"후우.."
빵집에서 산 샐러드 도시락을 책상에 내려놓은 소민은 또 다시 역겨운 것을 억지로 먹어야한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인상을 찌푸렸다.
"아.. 햄버거에 콜라 한 잔 먹었으면.. 크으.. 어?"
절대 좋아하지 않았을 패스트푸드가 갑자기 떠오른 소민은 상상만으로도 침을 질질 흘리는 자신에게 충격받고 정신차리기 위해 화장실로 달려갔다.
찬물로 샤워라도 하면 괜찮아 질 것 이라고 생각했다.
"..아 그러고보니 오늘 검도부 활동 안해서 저녁 운동을 못했네."
샤워를 하러 가기 전 저녁 운동을 안했다는 게 기억난 소민은 신발장으로 가 줄넘기를 꺼내 저녁 운동을 나갔다.
아무리 지혜가 비만화 개조를 위한 밑밥을 깔아뒀다고 하더라도 소민의 의지는 쉽게 꺾일 것이 아니였다.
저녁 운동을 다녀온 소민은 샤워 하고 샐러드 도시락을 억지로 입에 쑤셔넣었다.
절대 가족들처럼 되지 않겠다고 지내온 몇 년의 의지로 구역질을 참으며 꾸역꾸역 입으로 집어넣었다.
그 날 밤
모두가 잠든 새벽.
소민은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하고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지독한 배고픔이였다.
'꼬르르르륵'
"미치겠어.. 왜 이렇게 배고픈거야?"
여태까지 배고파서 잠을 못 잔 경우는 한번도 없었을텐데 소민은 규칙적인 수면을 방해받을 정도로 배고픔이 느껴지자 침대에서 끊임없이 뒤척였다.
"아오.. 물이라도 마셔야겠다."
물 배라도 채우면 낫겠지 싶었던 소민은 방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자극적인 향기가 소민의 코를 간지럽게 했다.
"흐윽?!"
아무래도 부엌에서 나는 듯한 냄새에 소민은 천천히 부엌으로 향했다.
"꺄악?!"
"어, 언니!"
소민의 언니인 한수정과 여동생인 한세희가 소민을 보고 귀신이라도 본 것 마냥 흠칫 놀라며 말했다.
아무래도 소민의 코를 간지럽히던 자극적인 향기는 이 두 명이 새벽 야식으로 끓여먹던 라면의 냄새였던 것 같았다.
소민은 두 사람을 보자마자 방금까지 느껴졌던 배고픔이나 맛있는 냄새는 기억에서 지워지고 바로 불쾌한 감정이 치솟았다.
"뭐해? 또 쳐먹어?"
"아, 아니 그러니까.. 내가 먹자고 했어. 세희는 잘 못 없어."
"그렇게 쳐먹으니까 야생 멧돼지마냥 살이 찌는 거라니까? 야 한세희, 너 살 빼랬지."
"읏.."
수정은 소민보다 언니지만 소민에게 힘이나 외모나 지식이나 여러가지 면에서 소민보다 뒤쳐지는 탓에 이런 식으로 험한 말을 들어도 반박 할 수 없었다.
수정이 할 수 있는거라곤 항상 동생이라고 소민에게 더 큰 폭언을 듣는 세희를 감싸는 것 뿐이였다.
"하아.. 왠 역겨운 냄새가 나나 싶더니."
소민은 원래 목적인 물병을 꺼내 방으로 들고가며 두 사람을 흘낏 노려보곤 말했다.
"빨리 쳐먹고 들어가 돼지새끼들아. 진짜 역겨워 죽겠네."
"으, 응.. 잘자 소민아."
소민은 수정의 인사를 받아주지 않고 그대로 돌아서 쾅! 하곤 방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언니 괜찮아?"
세희는 수정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 왜? 나 뭐 있어?"
수정은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세희에게 감정을 숨기며 말했다.
"야 ㅋㅋ 어서 먹자. 라면 불면 맛 없어."
"..응! 헤헤"
수정과 세희는 서로 느끼고 있는 감정을 숨긴 채 호로록 맛있게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둘째인 소민과 달리 두 사람은 서로 친하며 상처를 보듬어주는 우애깊은 자매였다.
물론 두 사람 다 아무렇지 않게 라면을 먹지만 각자 방으로 들어가면 소민의 폭언에 상처받아 눈물로 베개를 적실 예정이였다.
"휴우, 다 끝났다."
예습을 모두 끝낸 지혜는 공부한 노트를 정리하며 기지개를 쭉 피곤 웃었다.
요즘 자신의 경쟁자가 없다는 생각 탓인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공부를 할 수 있어 능률이 많이 오른 것 같았다.
별 생각없이 지혜는 자기 전 노트를 펼쳐 노예들의 행동을 슬쩍 지켜보고 잠에 들려고 했다.
"..응?"
노트를 훑어보던 지혜는 소민의 프로필에서 손이 멈추었다.
소민이 언니와 동생에게 폭언하는 것을 본 지혜는 씨익 웃으며 중얼거렸다.
"가족이랑 사이 안 좋다더니 이정도 일줄은.. 이거, 잘 이용하면 내가 애쓰지 않아도 되겠는데?"
재밌는 소재를 찾은 지혜는 내일 방과 후를 기대하며 침대에 누웠다.
벌써부터 앞으로 일어날 일이 설레여 미소가 배시시 나왔다.
지혜는 신과 직접 대화하고 노트를 업그레이드 받은 순간.
앞으로의 계획을 체계적으로 세워두었다.
"계약을 맺지 인간. 네가 누군가의 인생을 망칠 때 마다 그 망친 인생의 축복을 네게 나눠주마."
신은 그 날 지혜에게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의 인생을 망칠 때 마다 망친 인생으로부터 빼앗은 축복을 지혜에게 나눠주겠다고.
즉 지혜가 축복을 잔뜩 받기 위해서는 최대한 많은 인원의 인생을 망칠 필요가 있는 것이였다.
그 뜻으로 노트 역시 최대 5명의 인원을 조교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5명의 인생을 망치면 지혜의 삶은 축복으로 가득 찰 것이였다.
다만 여기서 문제가 생긴 것이 지혜 혼자 5명의 노예들을 다 관리 할 수는 없다는 것이였다.
아직 완전히 인생이 망가진 사람이 없어 이후로 노트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는 모르지만 인생을 망친 노예의 이후 삶 역시 아마 지혜가 관리해야할 것이라고 추측됐다.
민지 한 명 신경쓰는 것도 유나가 얽힌 사건과 같은 돌발 변수가 많은데 노예가 둘 셋 넷 늘어나면 지혜는 공부에 힘 쓸 시간도 없어지게 될 것이였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 지혜는 고민 한 끝에 자신이 민지를 떨어뜨리기 위해 미령과 혜윤을 엮은 것 마냥 각 노예마다 담당하는 조교사, 즉 주인님을 만들어 붙여주는 것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였다.
당장 혜윤도 미령이 전담하도록 지시했고 민지도 은영이와 역할을 좀 나눠 지혜가 신경 쓸 부분을 줄일 예정이였다.
그런 와중에 소민의 언니인 한수정과 동생인 한세희는 상당히 매력적인 소재로 다가왔다.
자신이 소민을 신경쓰지 않아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소민의 추락을 도와줄 수 있는 인재이면서 혜윤과 마찬가지로 소민에게 확실한 악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혜는 방과 후 소민의 언니인 한수정이 일하는 피씨방으로 찾아갔다.
수정은 뚱뚱한 탓에 카운터에 서있으면 손님들이 외견상 보기 안 좋다는 이유로 피씨방 안 쪽에서 조리나 설겆이, 쓰레기 비우기 등 궂은 일을 맡아 하고 있었다.
"어휴.."
오늘도 쓰레기를 비우기 위해 쓰레기장에서 끙끙대는 수정을 발견한 지혜가 수정을 불렀다.
"한수정 언니?"
"어?"
수정은 갑자기 누군가 자신을 부르자 당황하며 돌아보았다.
처음 보는 못생긴 여자애가 자신을 보며 히죽거리곤 손을 흔들고 있었다.
"누구..?"
수정이 조심스럽게 묻자 지혜가 대답했다.
"소민이 친구인데요. 언니에게 매력적인 제안을 드리고 싶어서요. 괜찮으실까요?"
"어?"
소민이 친구가 자신을 찾아왔다는 말에 당황한 수정은 들고 있던 쓰레기를 내려놓곤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하.. 그럼 짧게 해줄래? 보다시피 언니가 꼴이 좀 영 아니라서."
지혜는 씨익 웃곤 노트를 꺼내 수정에게 제안했다.
"만약 언니에게 복수의 기회가 찾아온다면 어떡하실래요?"
'혹시 정신 이상한 친구는 아니겠지?'
지혜의 말에 걱정이 든 수정이였지만 워낙 착한 성격 탓에 우선 이야기를 들어주기로 결심했다.
이야기를 들을 수록 수정의 눈은 커지면서 얼굴에는 미소가 지어지고 있었다.
그 날 저녁, 소민의 동생인 한세희의 방에 모인 수정과 세희는 오늘 지혜에게 들은 이야기로 대화하고 있었다.
"언니, 그걸 믿어? 딱 봐도 이상한 사람이잖아."
세희는 순진한 수정을 으이구 하는 표정으로 핀잔 주곤 유튜브를 보며 과자를 아삭거리기 시작했다.
"아냐! 그러니까 한번 시험삼아 해보자구. 마침 걔 운동 마치고 오는 시간이잖아. 해보자. 응?"
"아 그러다가 안되면! 그 말이 거짓말이면 우리 진짜 미친년 취급 받는다니까 소민언니한테?!"
세희는 수정의 제안이 영 탐탁치 않았다.
애초에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이 방법을 쓰면 소민이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을거에요.' 라고 하는 걸 곧이 곧대로 믿는 수정이 너무나도 답답했다.
"세희야. 한번만. 응? 언니가 언제 너한테 이렇게 부탁했어. 딱 한번만~"
"아! 알았어. 알았다구. 그대신 미친년 소리 들으면 나중에 밥 사줘."
수정의 애타는 부탁에 세희는 한숨을 쉬곤 소민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방 밖에서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소민이 들어오는 인기척이 들려왔다.
세희와 수정은 방에서 나가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있는 소민을 향해 나란히 섰다.
"..뭐야?"
자신이 들어오자 평소랑 다르게 앞에 선 두 사람을 보니 소민은 짜증이 밀려왔다.
밝은데서 보니까 두 사람은 더 뚱뚱해보였다. 소민은 한마디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비켜 돼지들아."
"소민아,(소민언니) 꿀꿀?"
수정은 진심을 다해, 세희는 반신반의하는 느낌으로 지혜에게 지시받은대로 말했다.
그러자 소민이 갑자기 들고있던 가방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히익?! 거봐 화났잖아! 응?"
"아, 아냐! 잘 봐 세희야 쟤 이상해!"
수정의 말대로 소민은 마치 실이 끊겨버린 인형마냥 추욱 처진 채 감정 없는 눈으로 서 있었다.
"..진짜야?"
"그 말이 사실이였어.."
수정은 씨익 웃으며 소민에게 다가가더니 세희를 보며 말했다.
"세희야. 너 혹시 둘째 언니가 우리랑 다시 친해지는 걸 보고 싶지 않니?"
"어?"
수정이 웃으며 말하자 세희는 수정이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 눈치챘다.
마침 신발장 옆에 붙어있는 전신거울로 자신의 몸매를 본 세희는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게, 소민 언니도 우리랑 친하게 지내고 싶겠지?"
그치~ 라고 말하며 두 사람은 자신들의 인형이 된 소민을 바라보며 웃었다.
지혜란 여자애가 소민이에게 하고 싶은 일을 휴대폰 번호로 보내주면 뭐든지 지원해주겠다고 했다.
앞으로 가족끼리 화목해지기 위해서 수정과 세희는 할 일을 정리하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