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그 사이에 다른 사람까지 또 엮은거야? 너 저번에 소민이 때 일 잊은거니?"
혜윤에게 맞을 때 노트에 적은 강제력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먹히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지혜였지만 민지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오히려 당당하게 말하며 민지에게 다가갔다.
물론 당장이라도 민지가 달려든다면 신체적으로도 민지에게 밀리는 지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얻어맞기만 하겠지만 당장은 민지가 겁을 먹고 있어 달려들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더이상 오는건 안돼. 물러나."
문제는 민지가 아니라 왠 처음보는 아줌마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다는 것이였다. 지민이 몹시 거슬렸던 지혜는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외쳤다.
"비켜요 아줌마. 이건 나랑 쟤 문제라구요."
"아, 아줌마?"
올해 26살인 지민은 지혜의 아줌마라는 말에 충격먹으며 말했다.
"말이 좀 거치네 우리 친구가. 저 노트로 이상한 짓 한다고 들었는데 좋은 말 할 때 물러나자?"
"으극..!"
여전히 최민지는 지혜의 눈치를 보며 도망가지 않은 상태였다. 노트를 펼쳐서 뭘 봤을지도 모르고 뭘 적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최민지를 잡을 수 있는 기회는 지금 뿐이였다.
"비키라고!"
어쩔 수 없이 지혜는 힘으로 뚫고 들어간다는 선택지 밖에 없었다. 지민을 있는 힘껏 밀쳐내며 지혜는 민지에게 달려들었다.
정확히는 달려들려고 했다.
"어?"
순식간에 육중한 지혜의 몸이 공중에 뜨는 듯 하더니 이내 엄청난 격통과 함께 지혜의 몸이 땅바닥에 내려꽂혔다. 그 와중에 최소한의 배려인지 머리가 콘크리트 바닥에 꽝! 하고 부딪히지 않도록 지민이 지혜의 머리는 잡아주었다.
"허윽..!"
그럼에도 맨 땅에 몸을 내다 꽂혔으니 지혜에게 충격이 없을 리가 없었다. 숨을 몰아 내쉬며 지혜는 놀란 눈으로 지민을 바라보았다.
"언니가 말했잖니. 좋은 말 할 때 물러나자고."
'이런 씨발.. 이년 뭐하는 년이야?!'
노트와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집에서 공부만 하던 탓에 지민을 모르는 지혜는 그녀가 격투기 선수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채 최민지가 또 어디서 이런 인맥을 데려온거야? 하는 생각만 들었다.
지민은 지혜가 발버둥치지 못하도록 꽈악 제압한 뒤 지혜를 일으키며 민지에게 말했다.
"자, 얘가 널 그렇게 괴롭힌 녀석인데. 하고 싶은 말은 없어?"
"어..네?"
지민의 말에 깜짝 놀란 민지가 지혜를 바라보았다. 지혜는 말 그대로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눈으로 민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혜의 그런 눈을 보자 민지는 마른 침을 삼켰다. 그리곤 그동안 민지가 몇번이나 되뇌었던 생각을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뭐?"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고. 이렇게 내 인생을 완전히 망가뜨릴 만큼 내가 잘못했냐고."
지금까지 민지에게 쌓인 응어리. 그것은 지혜가 대체 무슨 이유로 이렇게 까지 자신을 미워하고 인생을 망치려고 하는가 였다.
"여름방학때 돈 빌려간 것 때문이야? 내가 돌려줬으면 됐잖아. 안 돌려주면 그때는 경찰에 신고를 하면 됐잖아. 아니면 주변 어른에게 말을 하던가. 내가 그렇게 잘못했어?"
아무리 생각해도 민지는 지금까지 지혜와 얽힌 일이 없었다.
뭐, 혜윤이나 은영이야 자신이 콧대 높은 시절 저지른 잘못이 있으니 미움받는 건 그렇다 쳐도 지혜에게는 정말로 딱히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하.."
민지의 물음에 지혜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민지는 그런 지혜를 보며 다시 한번 물었다.
"말해줘. 나한테 왜 그러는건데."
"말해줄까? 니가 예쁘고 잘나가서야."
감정적으로 흔들리고 있던 지혜는 울컥하는 심정으로 대답했다. 의외의 대답에 지민과 민지 둘 다 당황한 기색을 보였지만 지혜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지금까지 행복했어? 부모 잘 만나고, 유전자 잘 받아서 예쁘고, 몸매 좋고, 머리도 좋고 얼마나 행복했겠어. 니가 노력한게 뭐가 있다고 그저 운이 좋아서 잘나간거면서!"
처음부터 그랬다.
민지와 지혜가 살아온 길은 극과 극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너무나도 달랐고 밑바닥에 가까운 지혜에게 있어 민지는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고 운이 자신의 능력인 것 마냥 지내는 여자였다.
지혜가 절대 가질 수 없는 것들을 가지면서 떵떵대는 모습이 꼴보기 싫었다.
"그런데, 그런데! 니가 나보다 성적까지 좋으면 안되는거잖아. 나는 너같은 인간들 따라잡아보려고, 어떻게든 넘어보려고 아둥바둥 발버둥치는데! 니가 그걸 가볍게 이겨버리면 안되는거잖아! 너보다 몇배, 아니 몇십배, 아니! 몇백배 노력하는데!"
지혜는 울분이 섞인 목소리로 소리치며 눈물을 흘렸다.
너무나도 분했기 때문에 속에 있던 말이 나오자 감정이 흔들린 것이다.
민지는 눈물을 흘리는 지혜를 바라보았다. 날뛰는 지혜를 단단하게 잡고 있던 지민 역시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민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작 그런 이유라고?"
민지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내가 엄마 아빠 잘 만나고, 예쁘고, 공부 잘한다는게 진짜 이유라고? 너한테 내가 잘못한게 있는게 아니라?"
지혜가 대화가 되는 상태였다면 민지도 어떻게든 노트를 통해 인생을 되돌리려고 할 생각이였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가해자인 지혜에게 직접 듣고 사과하며 어떻게든 풀어낸다면 자신의 삶을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했었다.
"진짜 역겹다. 김지혜. 넌 진짜 내가 본 사람 중에 가장 열등감 차있는 쓰레기야."
그러나 그런 민지의 생각도 방금 지혜의 말로 접을 수 있게 되었다. 민지는 노트를 꽈악 쥐더니 지민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민언니, 걔 꽉 붙잡고 같이 와주실 수 있나요? 이 노트. 태워버리려고 하는데."
"여기까지 얽혔는데 빼기도 좀 그렇고.. 나도 이유가 좀 기가 막혀서 할 말이 없네."
지민 역시 누군가의 인생을 망친 이유가 고작 열등감 때문이라는 사실을 듣자 황당한 감정이 들었다. 민지의 부탁대로 지민은 지혜를 잡아 이끌며 민지를 따라갔다.
"하, 당신도 얼굴 보아하니 인생 꽤 편하게 살았으니 나한테 공감 안되겠지. 저 년처럼!"
지민 역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지혜의 눈으로 보기엔 민지나 지민이나 똑같은 년이였다. 지민은 지혜의 말상대를 해주면 자기만 피곤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지혜의 말을 씹으면서 민지를 따라갔다.
"여기 쯤이면 되겠네요."
그렇게 세 사람이 도착한 곳은 어느 개천의 굴다리 밑이였다. 사람의 왕래도 적고 보는 눈도 적어 무언가를 태우기엔 안성맞춤이였다.
"고마워요 언니. 언니 덕분에 제가 해방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정말 팬이에요."
"뭐, 운이 좋은거지. 아직 완전한건 아니니까 얼른 불태우자."
지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민지는 노트를 바닥에 던져놓곤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원래 흡연을 하던 민지는 여름방학 이후에는 지혜에게 시달리면서 담배를 필 생각도 못하고 있었지만 라이터는 아직 가지고 있어서 다행이였다.
'탁 탁 치익~'
라이터의 불이 켜지고 불꽃이 흔들리자 지혜의 눈동자도 불꽃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민은 힘을 꽈악 주어 지혜가 아플 정도로 잡아두었지만 소용없었다.
"안돼! 내 노트. 그만둬, 하지마! 불태우지 말란 말야! 안돼!!"
발악하는 지혜를 바라보며 민지는 대답했다.
"김지혜, 보기 흉해. 너에 대한 보복은 생각도 안 들 정도로 역겨워."
근처 마른 나뭇잎에 불을 붙인 민지는 노트 위에 나뭇잎을 올려놓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안녕."
'화르르륵!'
"안돼!!!!"
종이로 이루어진 노트는 나뭇잎에 붙여둔 불이 옮겨 붙자 본격적으로 타기 시작했다. 노트가 불길에 휩싸이자 그제서야 지혜를 잡아두던 팔을 푼 지민은 한숨을 내쉬며 민지에게 향했다.
"잘 선택했어. 이미 잃은 것도 많지만 앞으로 회복하면 될거야."
"고마워요 언니. 저도 저런 년따위 이제 불쌍하게만 느껴져요. 이제야 각자 자리를 되찾은 것 같네요."
불타는 노트를 뒤로 하고 지민과 민지는 악수를 하고 굴다리 밖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지혜는 허탈하게 불타는 노트 앞에 주저 앉아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고 더이상 그녀에게 노림수는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대로 모든게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민지의 패인은 노트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였다.
"하하.."
"..뭐야?"
굴다리를 거의 나간 민지와 지민은 뒤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의아해하며 뒤를 돌아 지혜쪽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노트는 잘 불타고 있었고 지혜는 주저앉은 것처럼 보였다.
"하하하하.."
그러나 지혜는 웃고 있었다. 불꽃 때문에 그림자 진 지혜의 얼굴은 공포영화에서 볼 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푸하하하하하하! 최민지! 이 병신같은 년! 이건 몰랐겠지!!"
'미친건가?'
지혜의 반응에 당황하며 민지가 대처를 하지 못하고 있는 그 순간.
지혜는 불타는 노트에 달려들더니 새까만 노트를 집어들고 그대로 반대편 굴다리 밖으로 달렸다.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 지민이 지혜를 쫓아 뛰어가며 소리쳤다.
"어어?! 야! 미친년아! 뭐하는 짓이야!"
"언니! 아이 씨 진짜!"
지민이 달리자 민지도 따라 달리며 지혜를 쫓았다. 불덩어리를 맨 손으로 잡을 생각을 하다니 정말 김지혜는 미친 것이 분명했다.
어두운 굴다리를 전력질주해 밝은 빛이 비춰지는 바깥으로 나간 지민과 민지는 지혜가 개천으로 뛰어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개천 한복판에서 흠뻑 젖은 지혜는 미친년처럼 웃더니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병신같은 년 이건 몰랐겠지..! 노트는 절대 손상이 가지 않아! 물에 젖든 찢으려고 하든 불태우든 절대로! 절대로!!"
당연히 노트가 불타고 젖어서 사용 불가능이라고 생각했던 탓에 지혜가 말하기 전까지 지민과 민지는 방심하고 있었고 그 탓에 개천 한가운데서 지혜가 노트를 펼치더니 펜을 들고 무언가를 적는 것을 막지 못했다.
지혜가 노트에 무언가를 적자 깜짝 놀란 민지가 지민에게 소리쳤다.
"언니 저거 막아요! 언니는 아직 안 적혔으니까!"
"나도 알고 있어!"
지민은 민지의 말을 듣기도 전에 지혜에게 뛰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이내 무언가 둔탁한 것에 발이 걸린 지민은 크게 땅바닥에 구르며 넘어지고 말았다.
"너, 너! 왜?!"
"어?!"
민지가 있는 힘껏 지민의 다리를 붙잡고 있었다.
지혜는 이겼다는 표정을 지으며 노트를 두 사람에게 보이며 소리쳤다.
"하하하하하! 옆 사람을 잡는다. 라고 적는 것은 어렵지 않으니까! 아! 이제 알겠어. 왜 노트가 제대로 먹히고 있지 않았는지 알겠다고!"
지혜가 노트를 다시 집어들자 선명하게 머릿속으로 떠올려지는 기억이 있었다.
아마 신의 계시일 것이다. 신은 지혜가 불타는 노트를 집어들자 머릿속으로 계시를 넣어주었다.
'이것으로 네 시련은 끝이다. 다시 나의 사도로써 네 능력을 보여라. 시련을 극복한 네게 또 다른 능력을 주겠다.'
신에게 받은 능력이 머리에 뚜렷하게 인식되자 지혜는 곧바로 노트를 펼치며 민지를 향해 소리쳤다.
"야 최민지! 네 옆 사람의 정보를 내게 말해!"
"안돼!"
노트에 대해 대충이나마 들은 지민은 민지를 보며 소리쳤다. 민지 역시 알고 있었다. 지민이 노트에 적히면 모든게 끝장난다는 것을.
"바, 박지민! 여성 아마추어 격투가 선수! 나이는 26세고 남편이 있으며 아이는 아직 없음! 히익?!"
'내가 무슨 말을 하는거야?!'
지혜가 신에게 받은 새로운 능력. 그것은 민지를 통해 자신이 타락시키고자 하는 대상의 정보를 알아낼 수 있는 능력이였다.
앞으로 민지는 평생 지혜가 데리고 다니며 정보를 줄줄 뱉고 보조역할을 하는 노예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사실을 알 리가 없는 민지는 자신이 모르는 부분까지 입에서 멋대로 줄줄 나오자 황급히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지혜는 노트에 '박지민' 이라는 이름을 적으며 웃었다.
"설마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것 참 푸하하핫! "
양 손에 심한 화상을 입었고 개천에 뛰어드느냐고 돌에 부딪힌 다리에 피가 흐르며 몸 구석구석 안 아픈 구석이 없었지만 승리했다는 쾌감에 지혜는 미친듯이 소리쳤다.
지민과 민지 두 사람에겐 그런 지혜의 모습이 몹시 공포스러웠다.
"자, 그럼 두 사람 다. 느긋~하게 벌을 받아볼까?"
지혜는 다시 펜을 들었다. 우선 지민부터 완전히 제압하기 위함이였다.
민기 손
2024-08-17 01:20:15 +0000 UTC